Page 57 - 오산문화총서 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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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하자 당시의 수주 부사 안열(安悅)은 대부도민을 진압하여 그 공으로 5품관으로 승진하였고
수주를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로 승격시킴과 동시에 수원(水原)으로 개칭되었다가 그 뒤 다시
51)
수주목으로 승격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수주목은 수원부(水原府)가 되었다. 고려 후기의
수주는 현재의 충청도 일부까지 포괄하던 양광도(楊廣道)에 편제되어 있으면서, 또한 경기에 속
해 파견된 상주(常駐) 외관인 지주사(知晝使)의 행정통제를 받았으나 1390년(공양왕 2)에서야
비로소 경기좌도에 편제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5년(태조 4)에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양광도(楊廣
道)에 속해있던 수원부를 경기도로 편입하였고 그 뒤 1413년(태종 13)에 팔도체제가 확립되어
52)
수원부는 수원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 세종대 후반까지 경기도의 본영(本營)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53)
1457년(세조 3)에는 진관체제(鎭管體制)를 구축하였는데 경기도에서는 수원·광주·강화·
개성 등에 거진(巨鎭)이 설치되었다. 수원진(水原鎭)에는 부평(富平)·남양(南陽)·인천(仁川)·
안성(安城)·진위(振威)·양천(陽川)·용인(龍仁)·금천(衿川)·양성(陽城)·통진(通津)·김포
(金浦) 등이 속하였고 판관(判官)·교수(敎授)가 1명씩 증원되어 부사(府使)를 보좌하게 하였다.
54)
또한 『세종실록』과 『성종실록』 의 기록으로 보아 수원지역의 전체적인 규모와 비중이 점점 커
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1526년(중종 21)에 군민이 부모를 살해한 패륜적인 범죄가 일어나 수원군으로 강등되었
55)
다가 , 이후 이 지역의 비중이 강조되면서 군으로 강등 된 지 17년만인 중종 38년에 다시 도호
부로 승격돼 수원의 읍호가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권율이 독산성(禿山城)에서 승전을 거두기도 하였는데, 독산성은 당시 이 지
역의 유일한 관방시설로 1602년(선조 35)에는 수원부사가 방어사(防禦使)를 겸하게 하여 국방
상 요충지로 삼았다.
근대 이후의 오산지역은 1895년(고종 32)에 근대식 행정제도로서 지방제도를 개정, 23부제를
시행하여 유수부를 폐지하고 수원군으로 개칭하면서 일시 인천부(仁川部)관할로 된 적이 있으
나, 그 이듬해 13도제로 다시 바뀌면서 경기도 수원군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
51)『高麗史』券27 元年 12年 2月 辛丑條..
52)『太宗實錄』 卷26 太宗 13年 10月 辛酉條.
53)『世宗實錄』 卷148, 地理志, 京畿條.
54)『世宗實錄』 卷148, 地理志, 京畿條. / 『成宗實錄』 卷3, 元年 2月 己卯條.
55) 『中宗實錄』 卷 57 中宗 21年 8月 壬子條.
오산 독산성 일원 지표조사 보고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