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25 - 오산시사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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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팍골(골짜기) 223
은계동 뒷산(북쪽) 골짜기로 큰 돌이 내밀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생활환경
■ 금곡(마을) / 지명유래
은계동의 옛 지명으로 원래 수원군 어탄면(현 동탄) 지역으로 소일(素一), 쇠일, 금곡 등으로 불렸
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때 신암, 암산, 위포, 명학, 뱅골을 합하여 금곡리라 했고, 화성군
동탄면에 편입되었으나, 1987년 금곡리 일부가 오산읍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금곡리라는
지명은 필봉산 줄기에 금반향(金盤香)이란 좋은 명당 터가 있어 지어졌다는 설과 일제강점기 금이 나
온다는 골짜기로 소문이 퍼져 왜군을 비롯한 일본인들이 수없이 찾아들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는 설이 있다.
■ 새암(마을)
금곡리의 옛 지명으로 엄산 북쪽에 좋은 샘이 나오는 바위가 있어 선암, 샘, 새암 등으로 불렸다고
전한다.
■ 방곡(마을)
금곡리의 옛 지명으로 뱅골, 뱀골 등으로 불렸으며 예전에 뱀이 많은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
라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 박영효별장(터)
박영효별장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실제로 구한말 철종의 부마(영혜옹
주)였던 박영효의 별장(은계동 64번지, 1960~1970년대 유림각호텔과 주변 터, 지금의 황덕사 부근)
이 이곳에 있었는데, 현재는 다세대주택이 들어서 있다. 박영효가 죽고 난 뒤에도 그 며느리가 이곳
에 오면 동네 사람들을 위해 며칠간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그때 은계동 남쪽 오산천의 백사장 모래
밭에서 모래찜질을 즐기면서 놀았다고도 한다. 그리고 그 별장에는 고추장과 간장 등이 담긴 한 길
넘는 항아리가 수백 개가 있었다고 한다. 필자가 2002년 박영효별장을 관리하던 분의 가족(손자)을
통해 채록·조사한 바에 의하면, 박영효별장은 양철 지붕으로 된 단층이었고, 방이 네 개였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 집을 궐집 또는 궁집이라 불렀다 한다. 그 집은 1957년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다. 대문
은 솟을대문으로 대한문을 본떴는데 크기는 대한문의 3분의 2였다니 대단히 웅장하고 컸다. 별장은
정원을 곁들였는데 2천여 평이 넘었다고 한다. 박영효는 중국인을 고용하여 앞 텃밭에 토마토를 재
배하였다. 1919년 3월 오산독립만세운동 때에도 이 마을에는 일본 경찰이 얼씬도 못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오산독립만세운동에 가담했던 마을 사람들은 모두 무사했다 한다. 지금 천태종 황덕사가 있
는 곳이 마구간 자리였고 한 번에 대여섯 필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한다. 그가 말년에 낙향하여
직접 마을 사람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집 안팎일을 보살폈는데 품삯은 후했다고 한다. 별장은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