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 - 오산문화 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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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VOL. 61 osan culture
인화의 상징, 독산성 란 직전까지 남한산성보다 더욱 중시되었다.
독산성은 군사훈련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
독산성은 임진왜란 때부터 조선왕조가 주목한
다. 1594년과 1602년 두 차례, 어명을 받은 관
군사요새였다. 18세기 후반 독산성은 다시 한
료들이 독산성을 찾아 군사를 위로하고 무예
번 주목 받았다. 정조가 화성을 건설하면서
시험을 보아 우수한 성적을 거둔 자에게 부상
독산성은 화성과 짝을 이루어 현륭원과 행궁
을 내렸다. 이처럼 독산성이 지역방어는 물론
을 수호하고 도성을 방어하는 핵심 군사기지
군사교육과 무과시험장으로도 활용되었다. 특
로 활용되었다. 1800년 이후 군사적 요새로서
히 주목되는 것은 이 무렵부터 독산성에서 군
의 위상은 축소되었지만 현륭원과 건릉을 수
량마련을 위한 국영농장인 둔전(屯田)을 경영
호하는 역할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와 관련하
했던 사실이다. 모범적인 운영을 인정받아 다
여 독산성에 식목 담당관을 두어 나무 심기와
른 고을에서도 독산성의 사례를 본받아 둔전
수목 관리를 전담시켰던 사실은 새롭게 주목
을 운영하도록 지시했을 정도였다.
해야할 부분이다.
1610년 비변사의 보고에 따르면, 전쟁이 끝난
독산성은 인화(人和)와 지리(地利)의 중요성을
1598년 이후 경기도의 산성 17곳 중에서 수원
널리 알린 역사의 현장이다. 왜군의 포위 공격
의 독산성만 유일하게 제대로 관리되고 있었
을 유격전과 지구전을 배합한 전술로 물리친
다. 이처럼 독산성의 운영은 다른 고을 산성의
독산성에서 승리한 전술적 경험은 행주대첩으
모범이 되었던 것이다. 광해군은 교하(交河, 김
로 이어졌다. 이러한 사실을 배경으로 탄생된
포)지역에 독성산성의 예에 따라 성을 쌓고 궁
세마대의 전설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희
을 짓고 때때로 순행할 계획을 세웠을 정도로
망을 잃지 않았던 조상들의 용기와 지혜를 후
독산성을 중시했다.
손들에게 전달해 준다는 점에서 되새겨야할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독산성은 인
정신문화이다.
조의 피난처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 경기 방어
서애 유성룡은 독산성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사가 수원 군사 3,000명을 이끌고 남한산성에
이곳을 도성 방어의 요새로 건설하는데 힘을
들어가 인조를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하여 인
쏟았다. 1596년, 도체찰사의 신분으로 수원을
조시대에는 독산성을 관할한 수원부사의 위
찾은 유성룡은 독산성을 수축하고 창고를 지
상이 훈련대장과 거의 맞먹을 정도였다. 임란
어 곡식을 저장하고 군사교육을 실시했다. 아
과 호란을 겪으면서 독산성은 무향의 상징으
울러 성 안에 주택을 건설하여 주민들이 성에
로 널리 인식되었다. 이때부터 수원(현재의 화
들어와 살도록 지원했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성과 오산을 포함한 지역)을 ‘무향(武鄕)’이라
독산성은 경기남부 지역에서 유일하게 방어시
부르기 시작했다.
설을 온전히 갖춘 산성으로 자리 잡아 병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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