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 - 오산문화 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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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이야기









            영조, 사도세자, 정조 3대가 독산성에 오르다                    정조, 독산성에 나무를 심고 가꾸라

                                                         정조시대에 독산성은 새롭게 태어났다. 1792년에
                                                         성가퀴 309보를 신축하고, 수문(水門) 3곳을 개
                                                         축했으며, 지휘소인 남장대를 세웠다. 성의 둘레는
                                                         1,004보(步)에 이르렀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운주

                                                         당은 세자가 머물러 숙박했던 곳이며 장대는 진남
                                                         루(현 세마대)로서 옛날 올라가 보았던 유서 깊은
                                                         곳”이라는 사실을 언급하며 독산성이 단순한 군사
                                                         시설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후 독산성에

            1750년 가을, 영조는 온양 온천으로 가는 길에 독                서 벌목이 금지되고 매년 식목사업을 지속적으로
            산성을 찾아 임진왜란을 기억하며 군기(軍器)를 점                  벌였다. 1793년 정월, 정조는 수원을 유수부로 승
            검했다. 이때 영조의 명으로 독산성의 시설 전반                   격하면서 “독산성은 요새로서 중요한 지역이자 또
            에 대한 점검과 보수가 이루어졌다. 만 10년이 지                 군량을 쌓아둔 곳이니, 방어하는 도리를 소홀하게

            난 1760년 가을, 온양 온천으로 요양을 가던 사도                할 수 없다”며 경기 좌방영을 독산성으로 옮겨 설
            세자가 독산성에 올라 운주당(運籌堂)에서 하룻밤                   치하도록 했다.
            을 지냈다. 다음날 사도세자는 효종의 능침 후보                   화성 축성을 시작하면서 독산성은 화산 현륭원과
            지였던 화산을 둘러보고 독산성으로 돌아와 군대                    행궁을 호위하는 요새지로 구축되었다. 독산성 책

            를 사열하고 진남루에 올라 활을 쏜 후 무예를 시                  임자로 종2품의 중군을 임명하여 전략적 역할을
            험했다. 물론 이것은 효종의 북벌정책을 생각하면                   강화했다. 주목할 것은 이때 화성 주위에 대규모
            서 벌인 상징적 행사였다. 이때 사도세자는 독산                   둔전을 설치하여 호성에 주둔하는 장용영 군사와
            성 주변에 사는 백성들을 불러 모아 생활의 어려                   지역주민들에게 농사를 시켜 군영의 비용을 마련

            움을 물어보고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주었다.                   하도록 했던 일이다. 물론 이것은 200년 전 임진왜
            1790년 봄, 정조는 화산 현륭원을 참배하는 길에                 란 당시 둔전을 개척하여 자급자족한 독산성의 운
            독산성에 들러 특별한 행사를 벌였다. 정조는 운                   영 사례를 본받은 것이다. 자급자족의 신도시 화
            주당에서 사도세자가 백성들의 고충을 살피고 쌀                    성은 이처럼 독산성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

            을 나누어주었던 사실을 확인하고 자신도 노인들                    다. 독산성 중군이 산성에 부속된 마을 사람들 중
            에게 품계를 올려주고 쌀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에서 ‘식목인’을 선발하고 이들에게 오로지 나무를
            아버지가 효종의 북벌정책을 기억하며 독산성에서                    심고 가꾸는 일을 전담하도록 했다.
            활을 쏜 것처럼 자신도 행궁 득중정에서 활을 쏘

            아 부친을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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