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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제사 163
탑동에는 마을주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제의를 당제사라 한다. 이 마을의 토박이로 노인회장을 구비전승
맡은 바 있으신 최종관 어르신은 마을제사를 ‘당제사’라 한다고 하신다.
당제사는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에 지냈는데, 당제사 날을 잡고 나면 마을사람들은 당제사 열흘 전 · 민속
부터 마을의 외부에 가서 자지도 못하고, 부부관계도 못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당제를 지내는 날 당 · 경기도당굿과
제사를 모시기 전에 제물로 올릴 소의 어떤 부위를 먹거나 가져가면 불구자를 낳는다고 믿는 등 매우
엄격한 금기사항이 적용되었다고 한다.
당제사를 지내기 위해 당에 올라가는 사람은 당주를 비롯하여 축관과 심부름꾼 등 이렇게 세 사람 경기재인청
만이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당주와 축관이 일을 도맡아 하였다고 한다. 음식 장만은
거의 당주와 축관이 담당하였고, 당주는 음식 장만하는 일에서부터 당제사 당일 제사 올리는 일까지
맡아하였으며, 축관은 주로 축문을 만들어서 당주와 함께 당제사를 드릴 때 축문을 읽는 일을 하였 / 성씨
다. 그 외의 소소한 일들을 심부름꾼이 담당하였다. · 인물
당주가 준비하는 음식은 산제사에 올릴 떡시루나 조라술 등 조리를 필요로 하는 것들이었으며 그
밖에 과일, 북어 등은 장을 보았다고 한다. 조라술은 누룩과 엿기름을 함께 사용하는데 당제사가 있
는 날 새벽 당집에 올라가서 담갔으며 이를 밤에 걸러서 제주로 사용하였다.
탑동 당제사의 제수는 소 한 마리를 사용하였으나, 10여 년 전부터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소머리를 사다가 지냈다고 한다. 원래 소 한 마리를 쓸 때에는 소 부위별로 한군데씩 띠어다가 제수
로 바쳤다고 한다. 그런데, 쌍용제지가 동네에 들어오고 난 뒤 이러한 전례는 지속되지 못하였다. 왜
냐하면 농사만 짓던 사람들이 공장으로 나가게 되면서 수입은 좋아졌으나, 마을 일에 대한 동참은 급
감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까닭으로 소한마리가 소머리로 대체된 것이었다.
한편 탑동의 당집은 마을 뒤 당산에 있는데 원래 터주가리 형태의 것이었다고 한다. 이는 관리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번거롭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탑동 출신의 최성철씨가
마을의 당집을 새로 지을 수 있도록 자금을 쾌척하면서 현재의 당집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탑동 당집의 정면 좌측의 바닥에는 탑리산신당(塔里山神堂)이라고 쓰인 판석에 ‘최성철 건립’이라
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제보자 : 최선철(남,76세)ㆍ박옥현(여, 74세)부부, 최종관(남)
塔洞 山祭祝
維歲次 ○○十月 ○○朔 ○○日 幼學 ○○○
敢召告于
○(저)上山之神 ○(구)此一同
五百餘戶 十二個月
令太平安過 前歲載○(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