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깝게 전사하고 말았다. 그래서 창원 유씨의 집안에서는 그 시신을 거둬 배만이산의 기슭에 묘를 쓰고 55
비석 등의 상석을 세우려 하니 묘와 석물들이 가라앉아 지금까지 그 묘에는 석물이 없다고 전한다. 구비전승
그래서 마을에서는 지금도 이곳을 배만이산 또는 의정평(艤艇坪)이라고 부른다.
(12) 대호밭의 전설 · 민속 · 경기도당굿과
오랜 옛날 궁터 건너에는 석산굴에 숲이 우거져 호랑이가 출몰하였다고 전한다. 마을에는 우물이
두 곳 있는데 우물은 호랑이의 두 눈이고 묘지가 있는 곳은 호랑이의 입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고 전한다. 예전에 이 마을에 연안 김씨가 많이 모여 살았으며 그 때 진사를 지낸 분이 효심이 지극하 경기재인청
여 부모가 돌아가시자 3년을 지극 정성으로 시묘하였다. 어느 그믐날 밤에 부모의 묘소를 찾아뵙고
돌아오는데 날이 너무 어두워 앞이 보이지 않아 걷기도 힘이 들었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불을
밝혀 줘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고 전한다. / 성씨 · 인물
(13) 궁터 부자의 전설
예전에 궁터에 큰 부자가 살았는데 사람의 성격이 고약하고 남을 도울 줄도 모르고 욕심만 많았다.
하루는 스님이 시주를 왔는데 뒷간에서 인분을 퍼서 주니 스님이 돌아서 가며 말하기를 “집안이 번창
하려면 집에서 보이는 필봉산(내삼미동에 있는 산)이 보이지 않아야만 한다.”라고 혼잣말로 하고 가
니 욕심 많은 부자는 흙담을 높이 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흙담을 아무리 높이 쌓은들 앞에 있는 산
이 보이지 않을 리가 있는가. 결국 그 짓을 계속하니 집안의 가세가 기울고 폐가가 되었다고 전한다.
(14) 궐리사(闕里祠)
원래 궐리사는 동양의 대성인 공자의 생거지인 중국의 곡부현(曲阜縣) 궐리에 있으나, 우리나라에
서는 공자(孔子)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충남 논산의 노성(魯城) 궐리사와 오산의 화성궐리사(현재는
오산 화성 궐리사)등을 두었다. 오산궐리사는 우리나라 2대 궐리사 중의 하나이며, 공자의 64세손인
문헌공(文獻公) 공서린(孔瑞麟) 선생이 낙향하여 강당을 짓고 마당에 은행나무를 손수 심고는 북을 매
달고 두드려 후학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내던 곳이다. 그 후 선생이 돌아가시고 자연 폐허가 되었는
데 200여년이 지난 1792년에 정조대왕이 부왕의 능침인 화산릉에 와서 오산쪽의 화남방을 바라보니
상서로운 서기(瑞氣)가 보이고 군조(群鳥)가 운집하는 경관을 보시고는 신하를 시켜 살펴보라 명하였
다. 신하가 다녀와 은행나무에 얽힌 사실을 듣고 아뢰니 충효를 중히 여기던 정조 임금은 광덕에 있는
공자의 영정을 옮겨 화성궐리사로 명명하고 사액(賜額)을 내리니 그때부터 마을명이 궐리가 되었다고
전하며, 궐리사에는 목판으로 되어 있는 성적도가 있다. 또한 궐리사에 얽힌 전설은 다음과 같다.
공서린 선생이 처음에 심은 은행나무가 선생이 작고하자 건물도 폐허가 되고 나무도 죽었으나 2백
년이 지난 정조 12년경에 죽은 은행나무가 자생하여 1년에 수십 척이 자라는 것을 보고 인근 촌로들
이 모여 기이하게 생각하며 장차 공문(孔門)에 반드시 큰 경사가 있을 것이라 하더니 그 해에 왕명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