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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윤씨들이 외삼미에 터를 잡게 된 이야기

                    외삼미에 터를 잡으신 어른의 아버지께서는 역적으로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는데, 입향조께서
                  는 유모의 도움으로 피신을 해서 살아났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는 역사에 기록되지 못하였고 다만

                  후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하여지고 있는 이야기다. 유모가 얼마나 현명했으면 살려서 다시 길러 가

                  지고 어른이 되어서 복권할 수 있도록 하였으니 윤씨가문에 대단히 고마운 분이다.


                    외삼미 윤씨의 입향조는 응자 상자 하시는데, 응상공이 벼슬길에 나서서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고

                  한다. 사헌부의 감찰은 전국 지방을 순회하면서 관리들의 잘못을 탄핵하고 시정하는 일을 하였다. 그

                  래서 그때는 감찰을 독립기관으로 인정해서 일종의 암행어사한테 부하를 주듯이 그 감찰 밑에 20명
                  의 관원을 배속 시켰다.
                    그런데 응상공께서 지방을 돌다가 여기(외삼미) 와서 쉬는데 잠결에 신령이 나타나가지고 “이곳에

                  터를 잡고 살면 네 후손은 영원하리라.”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렇게 잠에서 깨어 생각하니 여기

                  가 집안의 한을 풀 수 있는 기회의 장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이 공부했던 여러 가지 지식으
                  로 주변 터를 살펴보고 과연 명당이 되겠다고 판단해서 이곳에 정착하기로 하였다고 전한다.



                    제보자께서는 “물론 그 꿈이 사실인지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우리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전설이니

                  까, 그것이 여태까지 우리한테까지 내려오고 있으니까 틀림없는 것이고, 여기 앉아 있는 이 터에다가
                  집을 짓고 사신 거야. 그 양반이 돌아가시니까 또 여기다가 산소를 썼고, 그래서 산소를 쓰고 그 아드
                  님이 지금 사는 집으로 ‘방곡’ 거기로 이사를 간 거야. 아늑하지 좋아요. 터가 둘러치고 있는데 뒤가

                  높지 않아요. 넓은 벌판에서 복이 들어오게 되어 있단 말이야. 언덕이 있으면 바람이 넘어오게 되어

                  있잖아. 유모가 젖을 먹이는 형상으로 되어 있단 말이야. 그런 땅이야. 그런 명당이다. 이쪽으로는 줄
                  기가 조금 높아서 여기까지 이어진 거야. 이것이 주산이야. 이것이 S자로 돌아 내려 간 거야. 여기 주
                  산이면 돌아서 꼬부렸어. 조상의 기하고 완전히 연결이 된 거야. 18대 동안 망하지 않고, 재산도 없앤

                  일이 없고 살아 내려오는 거야. 이 양반이 자리 잡고 터를 잡고 살면서 여기 땅을 자꾸 늘려 나갔지.

                  외삼미, 내삼미에만 땅을 산거야. 산소도 이 근방에만 썼고, 농사짓는 땅이 멀면 힘드니까 땅을 머슴
                  들한테 주는 거야. 열심히 하는 사람한테 싸게 주고 그 사람들이 되팔면 다시 사주고 그래서 능력 있
                  는 사람들한테 땅을 또 주는 거야. 그래서 농지를 개혁할 때 지주들의 땅을 뺏어서 소작농들 주고 그

                  랬는데 우리 집안에서는 그런 일이 한 건도 없었어요. 이미 다 줘서. 해방 후에도 잡음이 없이 넘어
      오산시사        갔어요. 지금 여기 추모비도 세워져 있지만 윤학영씨가 그런 일을 한 거야. 마을 전기도 종중에서 놔

                  줬어요. 외삼미동을 다 했고, 내삼미동은 돈이 부족하여 못 했어.”라고 그 소회를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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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             실제로 필자가 외삼미를 답사하면서 제보를 들으니, 삼미의숙의 설립을 비롯하여 윤씨들이 현 오
                  산시의 교육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에 초석을 놓고 토대를 마련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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