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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낭자를 발견한 그들은 서랑에게 접근하려 했으나 도무지 틈을 보이지 않자 강제로 서랑의 몸을 끌                                           57
                  어안고는 젖가슴을 주물렀다. 그러나 그들은 서랑의 완강한 반항과 서대감 집안의 위용에 눌려 뜻을                                           구비전승

                  이루지 못하고 물러갔다. 그 후 서랑은 집안에 들어와 오랑캐에게 능욕 당함을 분하게 여겨 오랑캐
                  의 손이 닿은 젖가슴을 물로 씻고 또 씻었으나 영원히 그 더러움을 지울 수 없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 민속

                  품에서 은장도를 꺼내어 젖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하였다. 나라의 위기에 여인네의 정절이 얼마나 부                                            · 경기도당굿과
                  질없는 것이며 얼마나 부끄러운 나라의 수치인가. 처녀의 몸으로 충절을 지킨 서랑의 시신을 접한 서

                  씨 문중에서는 그녀의 높은 뜻을 기려 마을의 서북쪽 장천골 선영(先塋)에 묘를 썼다. 그러나 서랑에
                  게 열녀문이 내려졌다는 기록이나 전설은 없다. 그것은 서봉학 장군이 패장이었고, 또한 전란 중이라
                                                                                                                    경기재인청
                  이 땅의 수많은 여인들이 여진족에게 짓밟혔으며, 수많은 서랑 같은 처지의 여인이 있었기에 흔한 이
                  야기로만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도 서랑의 묘는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며 마을을 바라보는 양지바른 곳에 있다.                                                                         /  성씨



                    (17) 청해 이씨 사당에 얽힌 전설                                                                          · 인물

                    가수동에는 청해 이씨 사당인 청해백사(靑海伯祠)가 있는데 이곳은 청해백 퉁두란 이지란(李之蘭)

                  을 받드는 사당이다. 원래는 지금의 자리에 있던 것이 아니라 현재 오산 초등학교 서쪽 변전소가 있
                  는 곳에 있는데 여러 번의 전화로 소실되어 다시 건립한 것인데 새로 건립할 때에 청해 이씨 집안에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청해백사가 임진왜란 등의 전화로 소실되었으나 후손들이 무관심하니 어느 날 밤 꿈에 이지란 장

                  군이 나타나 꾸짖으며 어디에 있으니 찾아다 다시 세우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후손 중에 한 사람이
                  찾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후손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다고 한다. 그 후에 여러 번 옮기

                  다가 최근까지 현재의 위치에 세우고 제향을 올린다고 전하나, 택지개발로 훼철되어 없어졌다.



                    (18) 장자못의 전설 외삼미

                    아득한 옛날 외삼미동에 큰 부자가 살았다. 그 부잣집 앞에 깊은 연못이 있었는데 명주실이 한 타

                  래나 들어가는 깊이였다고 한다. 어느 해 나라에 큰 난리가 일어나니 이 부자는 재산이 아까워 안절
                  부절을 못하였으나 할 수 없이 피난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고는 금은보화 패물을 그 연못에 숨기고는

                  피난을 떠났다고 한다.
                    그 이후에 청명한 날이면 연못에서 보석들의 서기로 빛이 났다고 전한다. 그래서 이 연못을 부자의

                  연못, 장자못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지금도 외삼미동 방곡(뱅골)에는 연못이 있으나 지금은 양어장으
                  로 이용되고 있다.




                    (19) 능지기와 정조 임금의 전설

                    조선 정조 때에 화산릉(현 융릉)지기가 살아는데 하루는 독산성 안의 보적사에 계시는 스님이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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