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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확쇠 1개를 새로 달았다. 주목되는 것은 남한산성을 개축할 때 사용했던 벽돌 대신 회와 기와를 사                                       505
                  용했다는 점이다. 공사가 완료되었음을 보고를 받은 정조는 다음과 같은 전교를 내렸다.                                                 역사

                    “…산성을 중시하는 것은 원침에 아주 가깝고 또 경진년(1760)에 사도세자가 어가를 멈추고 유숙했                                        /  유적
                  던 곳이기 때문이다. 장대(將臺)는 바로 진남루로 선대왕(영조)께서 올랐던 곳이다. 지금 수리하였다

                  하니 비문을 지어 내리겠다. 원임 각신 가운데 좌상이 써서 올리도록 분부하라. 경기 감영에서 장계                                          · 유물
                  로 청한 조목은 청한 대로 시행하도록 회유하라.”

                    독산성을 수축할 때 부족한 비용은 경기 감영에서 지불했다. 정조는 다음과 같은 전교를 다시 내렸
                  다.

                    “산성은 중요한 요해지이고 원침(園寢: 현륭원)에서 가깝다. 또 경진년(1760)에 사도세자가 머물러
                  숙박하였던 곳이며 장대(將臺)는 바로 진남루로서 옛날 올라가 보았던 곳이다. 지금 수리를 하였다

                  하니 비문을 지어 내려야겠다. 원임 각신들 중에서 적임자를 좌상(左相: 채제공)이 써서 올리도록 하
                  라.”

                    독산성을 새로 쌓고 보수할 때 수원부사 이경무가 실무 책임자를 맡았다. 이경무는 정조가 즉위한
                  뒤에 여사대장을 시작으로 경기수사, 금군별장, 삼도수군통제사, 어영대장, 포도대장을 거쳐 각 군영

                  대장을 두루 역임했다. 1792년에 수원부사에 임명되어 재직하던 중에 독산성을 보수하는 실무에 참
                  여하였다. 수원부사로 정조의 돈독한 신임을 받은 이경무는 이듬해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폭우로 산사태가 일어나 성벽이 허물어진 것을 계기로 독산성은 새롭게 단장되었다. 남한산성을
                  크게 보수한 지 13년이 지난 후이자 화성 성역이 시작되기 2년 전의 일이다. 따라서 독산성의 보수공

                  사에 남한산성을 개축했던 실무자들이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현재 독성산성의 수축에 관
                  한 기록은 단편적으로만 전해질 뿐이다. 『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일성록』에도 이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지만, 내용은 간략하고 중복되는 것이다. 남한산성을 보수했던 내용은 『중정남한지』에 실려
                  있다. 화성 축성에 관해서는 『화성성역의궤』에 세밀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런 사례에 비춰볼 때 독산

                  성을 수축했던 기록도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1793년 화성에 장용영 외영을 설치하면서 독산성도 요새로 강화되었다. 산성에 소속된 각종 군관

                  과 군보(軍保)는 2,123명이었다. 원래 2,439명이 있었는데 정조가 이 가운데 아동으로 구성된 316명
                  의 별무사를 해체하도록 지시하여 실재 병력이 2,123명이다. 아동 별무사를 뺀 정조의 결정은 너무나

                  잘한 일이다.
                    『장용영 외영 별단』을 보면 병사 스스로가 자신의 실력을 연마하는 사습(私習)을 날마다 실시하되

                  첫날과 마지막 날은 연병장에서 하는 규정과 똑같이 연습하도록 규정하였다. 무예의 실력을 시험하
                  여 시상하는 중일(中日)에는 『무예도보통지』에 의거하여 무예를 가르치고 시험 보이도록 하였다. 번

                  (근무)을 서기 시작하여 제 11일째 되는 날에는 활쏘기 시험[試射]과 조총 사격시험[試放]을 실시하고
                  우수한 성적을 거둔 군사들에게 상을 내렸다. 조총 사격연습을 할 때 필요한 화약과 탄환은 본부에서

                  지급해 주었다. 사습을 할 때나 무예 시험을 준비할 때 1초(哨: 120명 내외)마다 각각 진법(陣法) 교사
                  1명과 기예(技藝) 교사 1명을 배정하여 군사들을 가르쳐 완전하게 진법과 기예를 익히도록 하는 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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