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00 - 제2권
P. 500

2. 독산성에서 만나는 지리와 인화



                  1) 지리에 대한 정조의 생각


                    18세기의 개혁군주 정조는 성곽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정조는 1779년 효종의 120주기를 맞
                  아 명을 내려 남한산성 4대 문을 개축하고 성가퀴를 보수했으며, 1792년에는 장마로 허물어진 독산

                  성의 성벽과 진남루, 성가퀴 1,004보를 새롭게 수축하도록 했다. 독산성과 기각지세를 이루는 화성
                  을 건설하기 이전에 경기도를 대표하는 두 산성을 크게 보수했던 것이다.

                    성곽에 대한 정조의 관심과 이해의 수준은 병학의 전문가 못지않았다. 정조의 성곽에 대한 이해는
                  땅의 이로움을 뜻하는 지리(地利)에 기반을 두고 있다. 『손자병법』을 비롯한 병서에 핵심 개념으로 등

                  장하는 전통군사학의 용어인 ‘지리(地利)’에도 해박했던 정조는 ‘지리’라는 개념을 가장 많이 사용했던
                  국왕이기도 하다. 예컨대 『조선왕조실록』에 지리라는 용어를 검색하면 모두 103건이 나오는데, 5회

                  이상은 세조(6), 성종(10), 선조(23), 숙종(8), 정조(15) 다섯 왕이다. 23회로 횟수가 가장 많은 선조는
                  재위 기간이 42년이며 임란을 겪었던 반면, 평화로운 시대에 재위 기간도 24년인 정조가 15회나 된

                  다. 이처럼 정조는 가장 지리를 자주 언급했던 왕이다. 그렇다면 정조가 말하는 지리란 도대체 무엇
                  인가?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에는 지리학에 소홀한 조선의 학문풍토를 개탄하며 젊은 신하들에게 대안
                  을 요구하는 정조의 당부가 실려 있다.

                    “유독 우리 동방의 유자들은 명물학에 가장 소홀하여 전해 오는 지리서는 『여지승람』과 『문헌비고』
                  등 한두 종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 어찌 세상을 경영하는 박문(博聞)에 일조가 되겠느냐. 아니면

                  초야에 사람마다 각기 베갯속의 크나큰 보배가 있는데 단지 비각(秘閣 : 규장각)에만 수집하지 못한
                  것이냐. 바라건대 자대부는 나를 위하여 들추어내어 모두 대책편(對策編)에 저술하라. 내 친히 열람

                  하리라.”
                    지리학에 대한 정조의 깊은 관심과 풍부한 지식은 남한산성과 독산성의 보수 및 개축, 화성 건설에

                  서 빛을 발했다. 주목할 것은 화성을 축성하기 이전에 전국의 성곽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는 사실이
                  다. 정조는 이를 위해 팔도의 지방 수령들에게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의 산성과 읍성을 조사하여 도면

                  을 첨부한 보고서를 올리도록 지시했다.


                  2) 정조, 남한산성에서 지리와 인화를 말하다
      오산시사
                    1779년 효종의 120주기를 맞은 정조는 여주에 있는 영릉(寧陵)을 찾았다. 그런데 정조는 7박 8일의
                  영릉을 행차하는 기간 동안에 무려 4일을 남한산성에서 보냈다. 나흘 동안 병자호란 당시의 전적지


      제           를 몸소 답사하고, 성곽에서 벌이는 군사훈련인 성조(城操)를 직접 지휘했던 것이다. 아울러 산성에
      2
      권           근무를 서는 군사를 대상으로 무과를 시취하고, 관에서 양식을 빌린 백성들의 이자문서를 쌓아 놓고
                  불태우는 행사를 벌였다. 또한 정조는 대신과 장수들을 이끌고 병자호란 당시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

    500           을 직접 둘러보며, 왜 승리하고 패배했는지를 살펴보았다.
   495   496   497   498   499   500   501   502   503   504   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