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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노량사장에서 군병을 친열하면서 “수원의 군병은 가장 정예하다.”라고 감탄했던 것이나 “수 497
원의 7천 병마는 본래 날래고 사납다.”라는 신하의 발언은 독산성이 있는 오산의 상무적 분위기를 잘 역사
드러내고 있다. 1692년 가을, 노량사장에서 수원의 군병을 친히 사열한 뒤에 숙종은 이렇게 감탄했 / 유적
다.
“시골 군사들은 조련이 대체로 생소하여 대부분 모양을 이루지 못하는데, 유독 수원은 그렇지 아니 · 유물
하여 정예하다.”
10) 독산성에 봉수를 설치하다
도쿠가와 막부가 출범하면서 왜구가 사라지고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만주는 무
인지대가 되었다. 주변 정세가 안정되면서 한동안 독산성이 거론되지 않는다. 독산성이 다시 조정의
논의에 등장하는 것은 1682년(숙종 8년)이다. 이때는 청나라가 ‘삼번의 난’을 평정한 뒤 조선을 압박
하는 상황이었다. 조선이 북벌정책을 추진했던 사실을 청 조정이 파악하고 이를 문제 삼았던 것이다.
이때 독산성의 전력을 강화할 방안이 대두되었다. 그해 5월 총융사 김익훈은 “수원부의 독성산성은
지세가 뛰어나 방어에 편리하지만, 지휘관이 상주하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며 대책마련을 요청하자
병조에서 별장을 선발해 독산성에 보내고 총융청의 군향을 독산성으로 옮겨서 저장하도록 하였다.
1690년 4월에는 경기도의 요충지 수원의 봉수체계가 허술하니 독산성에 봉수를 설치하자는 주장
이 나왔다. 독산성 봉우리에 봉수대를 설치하면 삼남에서 올라오는 급한 경보를 모두 처리할 수 있다
는 것이다. 그런데 60여 년이 지난 1754년에도 독산성에 봉수를 설치하여 운영하자는 주장이 또 제
기되었다.
11) 영조와 사도세자 독산성에 오르다
노론의 지원으로 왕위에 오는 영조(재위, 1724~1776)는 탕평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1728년, 소
론과 남인이 연합하여 영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충청도에서 진군하는
이인좌의 반란군을 방어하는 역할을 수원부와 독산성이 맡았다. 당시 수원부는 마병 6초(738명)를
포함하여 6천 명의 병력을 갖추고 있었다. 훈련도감보다 1천 명이 더 많은 병력이다. 그럼에도 수원
부에서는 마병을 더 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병의 개인 무기인 마상편곤 1천 자루를 수원에 지
급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때 병력이 더 늘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1750년 9월, 영조는 온양 온천으로 가는 길에 수원 독산성에 올라 임진왜란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
렸다. 권율이 용맹과 기지를 발휘하여 왜적의 공격을 물리친 독산성 전투는 행주대첩의 전초전이다.
평양성 탈환과 행주대첩으로 전세를 역전시키면서 조선왕조가 지속될 수 있었다. 이날 영조는 독산
성의 군기를 점검하고 낡은 병기와 기치를 즉시 바꾸거나 수리하도록 했다.
영조가 독산성을 방문한 지 10년이 지난 1760년 7월, 사도세자가 온양 온천에 가는 길에 독산성에
들러 하룻밤을 지냈다. 정조는 이때의 일을 <행록(行錄)>을 참고하여 상세하게 기록한 ‘현륭원의 행
장’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