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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소조가 오랜 병을 앓고 있어 영종께서 온천욕을 하라고 하셨다. 수레가 강변에 이르니 물이
불어 뱃길이 좋지 않아 늦게야 비로소 건넜는데, 배 위에서 궁관 이수봉 등과 ‘임금은 배이고 백성
은 물’이라는 말에 대해 서로 논의하였다. 이튿날 수원에 갔는데 그 북쪽에 있는 화산이 바로 기해년
(1659)에 영릉(寧陵:효종릉)으로 치표한 곳이다. 거기 올라 사방을 두루 보며 한참 동안 감탄하며 구
경하고 산성(山城:독산성)으로 돌아와서는 무기(武技:무예)를 사열하였다.”
사도세자는 독산성에서 인화(人和)를 실천하였다. 독산성에서 사도세자가 효종의 능을 삼으려 했
던 화산이 근처에 있는 것을 보고 찾아가 수원읍성과 화산을 둘러본 뒤 독산성에 돌아와 군대를 사열
하고 무예를 시험하였다. 효종의 뜻을 되새기는 특별한 행사였다.
정조는 현륭원 행장에서 사도세자가 “효종을 닮았다.”는 말을 들었으며, 북벌을 계승하겠다는 의지
를 드러냈던 사실을 밝혔다. 또한 사도세자가 15, 16세 때부터 효종이 후원에서 무예를 연마할 때 사
용했던 청룡도와 철퇴를 들고 무예를 익혔으며, 『무예신식(무예신보)』을 편찬하여 훈련도감에 내려주
었다는 사실도 기록했다. 『무예신보』는 임진왜란 때 훈련도감에서 편찬한 『무예제보』의 무예 6가지에
12가지를 더해 18가지 무예에 그림과 설명을 붙여 펴낸 책이다. 정조는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와 박제
가, 장용영 초관 백동수를 불러 사도세자가 펴낸 『무예신보』에 마상쌍검, 마상월도 등 6가지 마상기
예를 덧붙여 『무예도보통지』를 펴내도록 명하였다.
이때 정조가 아버지에게 장헌세자(莊獻世子)라는 존호를 올렸던 사실도 주목된다. 사도라는 나약
한 이름 대신 씩씩하고 늠름하다는 뜻을 지닌 ‘장(莊)’이라는 글자를 통해 아버지에 대한 인상을 새롭
게 정립하였다. ‘장’은 무향(武鄕)으로 불리던 수원부의 강무당 터에 사도세자의 묘소를 옮긴 사실과
겹치는 글자이다.
12) 정조, 독산성에서 새로운 도시를 계획하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산에 이장하기로 결정한 1789년 7월, 신하들이 독산성을 그대로 두
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화산의 원소와 병기(兵器)를 갖춘 독산성이 너무 가깝다는 것이다. 왕
실의 묘소인 능원에서 10리 이내에는 공사 시설물을 둘 수 없는 규정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는 “독산
성과 화산의 거리가 10리나 떨어져 있으므로 산성에 병기를 간직하는 일은 무방하다.”며 이러한 주
장을 물리쳤다. 현륭원 때문에 독산성의 군사적 기능과 요새로서의 역할이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같은 해 10월,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 화산에 이장하고 현륭원이라 하였다. 이듬해 봄, 화
산 현륭원을 참배하는 길에 정조는 독산성에서 특별한 행사를 벌였다. 31년 전, 백성들에게 칭송을
오산시사
받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백성들의 증언을 통해 밝히는 행사였다. 운주당에 도착한 정조는 국왕 행차
를 보기 위해 모여 있는 사람들을 통해 사도세자가 백성들의 고충을 물어보고 창고의 곡식을 풀어 나
제
2 누어주었다는 것과 진남루에 올라 활을 쏘아 과녁에 4발을 명중시켰던 이야기를 들었다. 사도세자가
권
독산성에서 인화(人和)의 덕치를 펼쳤던 것을 확인한 정조는 참석한 노인들에게 품계를 한 자급씩 올
려주고, 집집마다 쌀 한 섬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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