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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지방이 교생을 모두 모아서 대오에 편입시키고 ‘교생군’이라고 호칭하자 민중이 싫어하지 않은
                  것은 명분이 낮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부터 조성된 오산과 수원의 상무적 기풍은 병자호란에서도 발휘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는 김준룡 장군이 지휘한 광교산 전투에서 파죽지세의 청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독산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수원과 오산지역의 상무적 기풍은 병자

                  호란 때도 지속되었다. 김준룡 장군이 지휘한 광교산 전투에서 청나라 군대에 승리를 거두었던 사실
                  도 이 지역에서 만들어진 상무적 전통이 한몫을 했을 것이다.

                    수원과 독산성은 병자호란 때 다시 주목되었다. 경기방어사 구인후(具仁垕, 1578〜1658)가 수원
                  군사 3천 명을 이끌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국왕 인조를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했던 것이다. 인조는 구

                  인후를 어영대장에 임명하고, 수원 군사 3천 명에게 각각 무명 1필과 술을 내려 수고를 위로했다. 수
                  원 군사는 속오군으로 급료병인 훈련도감 군사와 달리 옷과 양식을 스스로 마련했으나 “임금이 거동

                  할 때면 즐겁게 달려온다.”고 감탄할 정도로 충성심이 높아 왕의 사랑과 기대를 받았다. 구인후를 이
                  어 수원부사에 임명된 조계원(趙啓遠, 1592~1670)은 군사 수를 2천 명 더 늘여 5천 명을 확보하였다.

                  수원에 군사를 강화하면서 수원부사의 위상이 훈련대장과 엇비슷할 정도로 높아졌다. 호란 직후인
                  1639년에 독산성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는데 당시 기병 75호, 보병(군병 300명과 충장위 28명, 충순위

                  5명) 333명이 독산성에 소속되어 있었다.


                  9) 효종의 북벌정책과 독산성

                    효종(재위, 1649~1659)이 북벌을 추진하면서 수원부와 독산성의 군사력도 크게 강화되었다. 효종

                  은 훈련대장 이완(李浣, 1602~1674)을 중심으로 신무기 개발과 병력 증강에 집중하였다. 1654년 12
                  월에 총융사 김응해를 보내 경기 여러 고을의 군사와 병기들을 점검했는데, 수원이 도내에서 최고 우

                  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효종은 수원부사 유혁연(柳赫然, 1616~1680)에게 말을 하사하고 승지에 제
                  수하였다. 얼마 후 효종은 유혁연을 어영대장에 임명하여 훈련대장 이완과 함께 북벌정책을 추진하

                  도록 하였다. 류혁연은 어영청을 북벌의 주력군으로 확대 개편하여 군사력을 강화했으며, 훈련대장
                  이완과 협력하여 인조반정 후 군영에 성행했던 ‘기찰(譏察:사찰)’을 근절시켰다.  또한 화약의 원료가

                  되는 유황광을 개발하고 조총을 비롯한 화기의 성능을 크게 높였다.
                    효종은 수원의 군병이 훈련도감보다 많고 실력도 낫다는 신하의 말을 듣고 “수원은 본디 무향(武

                  鄕)”이라고 화답했을 정도로 수원의 상무 기풍을 높이 평가했다.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시대에는 수
      오산시사
                  원의 군병이 최대 8천 명이나 되었다.

                    안팎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 추진된 북벌정책이지만, 이 과정을 통해 경기도를 비롯한 지방 군대
      제

      2           의 전투력도 크게 향상되었다. 이 시기에도 독산성은 수원읍성과 함께 관리되었다. 군무에 밝았던 좌
      권
                  의정 이시백(李時白, 1581~1660)의 보고에 따르면 1651년 10월 당시 독성산성에 민가 40여 호(戶)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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