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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졌으나 어이없이 패배한 용인전투는 조야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때부터 험한 산성에 진을 치고 왜적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일어났다. 비변사 역시 산성

                  방어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적과 대치하여 공격을 하거나 수비를 하려면 먼저 유리한 지형을
                  차지해야 한다. 그런 곳은 적이 꼭 지나는 곳이며 우리가 반드시 빼앗아야 할 지역이다. 유리한 지형

                  을 얻으면 승리하고 유리한 지형을 잃으면 패배하는 것이다.”
                    충주 탄금대에서 명장 신립이 패하고 용인에서 삼 도의 5만의 대군이 패한 까닭도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진단이었다. 천하의 요새인 새재를 버린 것이나 용인에서 유리한 지형
                  을 선점하고 있는 왜군을 섣불리 공격한 것은 잘못된 작전이라는 지적이다.

                    용인전투의 패배로 경기도가 적중에 떨어지면서 왜적에게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식량과 재
                  물을 빼앗겼다. 승리할 전망이 보이지 않자 동족을 배반하고 왜적을 따라 서울 도성에 들어간 사람들

                  도 생겨났다. 이런 때에 호남의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1537~1593)의 부대가 독산성에 들어갔다. 김
                  천일은 지역을 순시하며 민심을 안정시키고 왜적에게 빌붙은 사람을 찾아내 목을 베고 의병부대가

                  독산성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위에 널리 알렸다. 김천일 의병부대가 독산성을 장악했다는 소
                  문이 나자 경기도의 양반사대부를 비롯한 백성들이 성으로 찾아왔다.

                    용인전투에서 패배한 광주목사 권율은 휘하 군사를 이끌고 질서 있게 광주로 퇴각하여 이웃 전주
                  에서 전력을 가다듬어 7월 8일 이치(梨峙)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공으로 권율은 전라감사 겸

                  순찰사에 임명되었다. 승리한 기세를 몰아 진격하던 권율도 곧장 진격하지 않고 군대를 독산성에 주
                  둔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가 권율에게 보검을 하사하여 독려하였다. 한양에 왜군 주력부대가 주

                  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율이 독산성에 진지를 구축한 사실을 알고 왜군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
                  에(字喜多秀家)가 군대를 이끌고 독산성을 포위하고 집중 공격했으나 권율은 맞서지 않고 산성의 지

                  리를 최대한 활용하여 유격전과 지구전으로 지혜롭게 물리쳤다. 이 과정에서 ‘쌀로 말을 목욕시켰다.’
                  는 세마대(洗馬臺)의 전설이 탄생하였다.

                    1593년 1월 9일, 조명연합군이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이 장악하고 있던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성
                  공하면서 전쟁의 양상이 바뀌었다. 그러나 같은 달 27일 퇴각하는 왜군을 뒤쫓던 명 제독 이여송 부

                  대가 고양 벽제관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면서 명군은 전투를 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에서 같은 달, 고양 행주산성에서 권율 장군이 2천3백의 군사로 3만의 최정예 왜군을 물리치는 행주

                  대첩을 이루었다. 행주대첩은 독산성의 지리를 활용한 유격전과 추격전을 통해 산성을 포위하고 공
                  격하는 왜적을 잘 방어하여 군사력을 온전히 보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산시사
                  5) 독산성에서 백성들의 소리를 듣다

                    임진왜란의 전개 과정을 날짜별로 기록한 의병장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수원산성과 독산성을 언
      제

      2           급하고 있다. 1592년 7월에 “지난달 23일에 의병장을 따라 수원산성에 이르러 5일간을 머물렀다.”는
      권
                  기록과 같은 해 10월에 “전라감사 권율이 수원 독성에 있으면서”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처럼 수원
                  읍성과 독산성은 의병장 김천일과 의병장 홍계남의 부대, 그리고 권율의 부대가 번갈아 주둔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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