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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절 병학으로 본 독산성 489
역사 / 유적
김영호 | 한국병학연구소장 · 유물
1. 독산성의 지리적 조건
1) 독산성이 품고 있는 승리의 조건
독산성은 산 이름에 ‘성(城)’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을 정도로 아주 오래전부터 요새로 주목을 받
았다. 이름처럼 ‘민둥산’이던 독산(禿山)은 비록 해발에 불과하지만, 주위 산보다는 지대가 높아 사방
이 막힘없이 조망될 뿐 아니라 정상 부위가 가파른 비탈로 둘러싸여 있고 정상 부위가 평평한 지대여
서 적을 방어하기에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 독산성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
제17대 내물왕시대(재위356~402)에 백제의 독산성주(城主)가 300명의 주민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
하자 받아주었다는 것이다.
독산성은 ‘독성(禿城)’ 혹은 ‘독성산성(禿城山城)’으로도 불려졌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보면 독
산성은 2회, 독성산성은 16회, 독성은 무려 86회나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예전에는 독산성보다 독성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조선왕조실록』에 ‘수원산성(水原山城)’이라는
용어가 4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독산성은 수원산성으로 불리기도 했던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수
원산성은 독산성을 가리키는 것이 거의 확실하지만, 1789년까지 수원읍치를 싸고 있는 수원고(古)읍
성(이후 수원읍성)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러나 정조가 화산에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을 조성한
이후 수원읍성의 존재는 거의 잊히게 되었다. 독산성과 수원읍성은 서로 협력하고 보완하는 관계였
다. 다시 말해 수원읍성과 독산성은 ‘기각지세(掎角之勢)’이다. 따라서 독산성은 수원읍성과 연계해서
살펴야 그 전략적인 가치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의 관찬사료
에 “독산성은 수원읍성과 ‘기각지세’를 이루고 있다.”라는 표현이 자주 나타난다. ‘기각지세’란 달아나
려는 사슴의 뿔을 앞에서 잡고 뒤에서 다리를 잡는 것처럼 앞뒤에서 적을 협공한다는 뜻이다. 독산성
과 수원읍성은 10리에 불과해 적을 양면에서 공격하기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독산성의 전략적 가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삼남(三南: 경상 전라 충청)과 한양을 잇는 경기도의
중심에 있다는 점, 둘째, 황구지천이 자연 해자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 셋째, 황구지천이 서해와
내륙으로 연결되어 물자 수송에 편리하다는 점, 넷째, 산성 주변에 둔전(屯田)으로 활용된 농지가 펼
쳐져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