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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가(民家)가 거주하였던 생활공간이었으며, 167칸이 넘는 관청(官廳)이 들어서 있던 경기남부지역
                  의 군사행정 중심지였다. 특히 정조 때에 설치된 장영외영이 화성과 독성산성에 주둔하며 협수체제

                  를 구축하면서 경기남부의 웅진(雄鎭)으로서 그 위상이 강화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산성연구에 귀
                  중한 자료를 제공하는 역사적인 유적지라 할 수 있다.

                    독성산성은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면서 독성산성 내의 군사시설이 상당수 파괴된 것
                  으로 추정되며, 1914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산성 내의 주민도 소개(疏開)되어 독성산성은 쇠락

                  (衰落)의 길을 걷게 되고,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현장으로 부각되자, 일제는 성을 허물어 버려
                  진 성이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독성산성은 많은 폭격을 당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인

                  근에 건립된 UN군 참전 초전비가 전쟁 당시의 정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1957년 ‘세마대중건위원회’가 조직되어 독성산성 내에 ‘세마대’를 복원하였고, 1964년 8월 29일 사

                  적 제140호로 지정되었다. 1982년에는 경기도에서 성곽주위를 정비하고, 동문과 북문 주위의 허물어
                  진 성벽과 치(稚) 2개소를 보수하였다.





                  4. 독성산성의 관리자 중군-별장


                    1793년 1월 12일 정조는 수원을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켰다. 정조는 수원을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

                  면서 독성중군의 경우 전례에 따라 마땅히 본부소관의 중군이 되어야 하나 중군의 이력을 개성 대흥
                  산성의 예에 따라야 하는지, 개성보다 조금 더 높은 계급으로 하여야 하는지, 또 직무 담당은 ‘즙힐지
                  정(緝詰之政, 군사행정)’을 관장하는데 토포사의 명호를 겸하지 않을 것인지 그렇다면 토포사는 신설

                  할 방영에서 겸대할 것인지 등을 비변사에서 품처하게 하였다.                   69)

                    비변사에서는 수원유수를 개성유수보다 1등을 더한 정2품으로 하였으니 중군 또한 조금 더 높은
                  계급으로 해야 하고, 변지(邊地) 수령 이상의 인물을 차견하는 것을 정식으로 하였다. 또한 중군의 직
                  무는 군사행정만 담당하게 하고, 남양 방영에 경기토포사를 신설하되 수원유수부 내의 금집지정(禁

                  戢之政)은 개성과 강화의 예에 따라 본부에서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어 윤허되었다.                             70)

                    화성유수는 장용외사(壯勇外使)와 행궁 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임하게 되는데 장용영이라 이름
                  한 군영에서 독성산성을 관리하게 된 것이다. 1793년 1월 25일 제정된 「장용영진내외영신정절목」에
                  의하면 독성산성에는 장초(壯抄) 2초, 아병 1초, 둔장초(屯壯抄) 68명, 군수보(軍需保) 125명을 두고,

                  본성의 소관 아래 모집해 들인 군관 30인, 수첩군관 130인, 아병 2초, 봉족군(奉足軍) 400명, 별무사
                                                                         71)
      오산시사        1523명과 합해서 성을 수비한다는 명목으로 본성에 전속시켰다.  이때 독성의 중군은 곧 화성유수



      제

      2           69) 『日省錄』 正祖 17年 1月 15日 己酉.
      권           70) 『日省錄』 正祖 17年 1月 16日 庚戌.
                  71)  『日省錄』 正祖 17年 1月 25日 己未. “壯勇營進內外營新定節目. …禿城山城旣係關防重地 且是軍餉所峙 則拱禦之方 不可疏虞 在前
                     總廳所管壯抄二哨 牙兵一哨 屯壯抄六十八名 軍需保一百二十五名 竝本城所管募入軍官三十人 守堞軍官一百三十人 牙名二哨 保
                     軍四百名 別武士一千五百二十三名 而以守城名色專屬本城 而其中壯抄二哨 牙兵一哨 屯壯抄六十八名 軍需保一百二十五名 自是
    484              納米之軍 納米則自外營捧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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