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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가자(加資)하고, 군관과 읍교(邑校), 색리들에게 시상하면서 공역을 마무리하였다.
                    정조는 독성산성이 소중한 것은 원침에서 밀통(密通)하고 1760년 사도세자가 주숙(駐宿)한 곳이기

                  때문이며, 장대인 진남루는 예전에 등림한 곳이니 중수한 지금 마땅히 비문을 지어 내릴 것이니 원임
                  각신 중에서 좌상 채제공이 써서 올리라 하였다. 그리고 1792년 10월 7일 성황신에게 독성산성의 수

                  개를 알리는 고유제를 올렸다.         47)
                    1792년의 독성산성 수축은 이듬해 창설되는 장용외영의 주둔지를 정비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1793년 1월 수원부를 유수부로 승격하면서 유수는 장용외사를 겸하게 하였는데, 유수영은
                  산성을 주둔지로 삼고 있는 예에 따라 독성산성을 수축하였던 것이다. 정조는 독성산성의 수축을 통

                  해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곧이어 진행되는 화성성역을 준비하였다. 수원부 신읍치에 읍성이 없는
                  것을 우려하여 1794년 화성(華城)의 축성을 시작하였고, 1796년 화성이 완공된 후에는 화성이 장용외

                  영의 주성(主城)이 되어 독성산성과 협수체제를 구축하여 수원부의 방비를 확고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림 5. 독산성 북동쪽 치 하부 삼국시대 성벽과 상부의 조선시대 성벽 전경(중부고고학연구소 2019)

      오산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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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0           47)  『內閣日曆』 正祖 16年 10月 7日 壬申. “御製禿城山城修改後告由 城隍神文 諏日之吉·營疆理·告厥成 百·千雉 地以增重 儼若大都
                                 .
                     維萬斯年 壯我鴻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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