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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었다. 이때 2월 25일에는 충청감사 허욱(許頊)과 전라 병사 선거이가 독성산성을 지키고 있었다.                                        475
                  하지만, 2월 28일 충청감사 허욱 부대가 충청도로 돌아감에 따라 독성산성은 전라 병사 선거이 부대                                         역사

                  가 지키게 되었다.     30)                                                                               /  유적





                  2. 국왕의 행차                                                                                       · 유물

                    독성산성은 조선 후기 국왕과 왕세자의 행차가 여러 차례 이루어졌던 유적이기도 하다. 1750년(영

                                                                                            31)
                  조 26년) 온양온천에 행차하였던 영조는 한양으로 환궁하는 도중에 독성산성에 올랐다.  이때 영조
                  는 임진왜란 때의 일을 상고하면서 명나라의 은혜를 회상하였으며, 황경원에게 명하여 독성(禿城)의
                  군기(軍器)를 살펴보게 하여 궁시(弓矢)와 검극(劍戟)·기고(旗鼓) 등을 개수(改修)하도록 하였다. 군
                  사상의 요충지인 독성산성의 방비를 항상 튼튼히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1760년(영조 36년)에는 사도세자가 온양에 행차하였다가 돌아가던 도중 장마로 인해 황구지천을

                  건널 수 없게 되자 독성산성에 올라가 하룻밤 유숙(留宿)하게 된다. 이때 사도세자는 다음 날 아침 진
                                                                32)
                  남루에 올라 활쏘기를 하였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사도세자는 산성을 둘러보고 “이 성은 들판
                  가운데 불룩하게 나와 무릇 이와 같으니 실로 높이 솟아난 곳이 있고 특별히 이루어진 것이다. 적이

                  만약 가볍게 여기고 경솔하게 침범한다면 반드시 낭패할 것이다. 권율의 대첩이 좋은 전례이다”라고

                  독성산성의 전략적 가치를 평가하였다. 또한 령을 내려 창고의 쌀 20석을 내어 호가군병(護駕軍兵 :
                                                                                   33)
                  수레를 호위하는 군병)에게 나누어 주고 성내 민인(民人)을 공궤(供饋)하였다.  사도세자의 독성산성
                  유숙은 이른바 ‘경진년(庚辰年) 경숙(經宿)’으로 불리면서 정조 때 있었던 대대적인 독성산성 정비의

                  한 원인이 되었다.

                    1789년 정조는 사도세자의 원침(園寢)을 수원부 읍치자리(현재의 융릉)로 천봉하였고, 이에 따라
                  독성산성은 이전과는 다른 관점에서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독성산성은 현륭원에서 바라보이
                  는 곳에 위치하여 산성의 바위가 보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독성산성을 그대로 두어야 마땅한지 훼

                  철해야 할 것인지를 두고 원소도감당상 정민시(鄭民始)와 총호사 김익(金熤) 사이에 의견이 갈렸다.

                    즉, 정민시는 독성산성의 형국(形局)이 목국(木局)이고 산성에는 군기(軍器)를 저치(儲置)해 두고
                  있으며, 이읍하는 마당에 산성을 별설(別設)해 둘 필요가 없기 때문에 독성산성을 그대로 두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김익은 원소와 산성의 거리가 조금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의견이었다. 그러자 정조는 한 번 친심(親審)한 후에 결정하겠다고 하면서도 산성의

                  봉우리가 혈상(穴上)에서 바라보여 지근거리인 것 같지만 거리가 10리 정도 떨어져 있고 연화(煙火)





                  29) 『宣祖實錄』 卷35, 26年 2月 25日 庚戌.
                  30) 『宣祖實錄』 卷35, 26年 2月 28日 癸丑.
                  31) 『英祖實錄』 卷72, 26年 9月 26日 乙丑.
                  32) 서울大學校 奎章閣編, 『京畿道邑誌』 1, 「水原府邑誌」. 山城.
                  33) 『華城誌』 卷2. 「山城」 禿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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