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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조정은 홍계남을 수원판관에 임명하였다. 당시 전쟁의 초기에 수원은 창곡과 군민이 제일 넉넉하 471
고도 많아 서울의 울타리라고 인식되었다. 당시 적도들이 여러 차례 수원부에 들어갔으나 물력이 감 역사
소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용맹이 뛰어난 사람을 가려 지키게 하고, 양주와 함께 기각의 형세를 이루게 / 유적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 별도로 판단을 제정하도록 하였다. 그해 9월 21일에 조경(趙儆)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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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부사로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후일 휘하병력을 이끌고 권율 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 유물
(3) 권율의 독성산성 전투
이치전투를 승리로 이끈 전라순찰사 권율(權慄)은 방어사 황진(黃進)에게 이치를 지키게 하고 전주
로 들어가 기율(紀律)을 일신하고 도내의 병력을 재정비하였다. 9월 22일에 권율은 장수들에게 “지
금 평양 이남이 모두 적의 진지가 되어 버렸지만, 도성은 근본이 되는 곳이니 먼저 도성을 수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북진을 하자 각 고을 수령과 의승장 처영 등이 함께 따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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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권율 휘하에는 수원부사로 조방장에 임명된 조경, 의병장 변사정, 의승장 처영, 전라도 병사 선
거이, 초모사 변이중, 의병장, 임희진 등으로 이루어졌고, 일본군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부장이 한양과 용인 병력 2만여 명 가운데 일부가 대적하였다.
그해 10월 충청도 직산에 도착한 권율은 직산에 있던 양남도체찰사 정철(鄭澈)을 만났다. 정철이
군량 마련 등에 어려움이 있으니 경솔하게 진격하지 말고 돌아가 관내를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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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에 권율이 그대로 머물며 행재소에 상황을 보고하자, 선조는 전지를 내려 북진을 명하였다.
이때 선조는 차고 있던 검을 하사하며 “모든 장수 중에 명령을 듣지 않는 자가 있거든 이 칼로 처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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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였다. 이에 권율은 그해 12월 수원의 독성산성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하였다. 계속 북상
하지 않은 이유는 지난날 전라감사 이광이 백광언을 따라 북상하여 용인전투에서 무리한 공격으로
패전한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한편, 한양에 주둔하던 일본군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는 권율이 호남에서 대군을 이끌고 북진
하여 독성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후방과의 연락 및 보급선이 차단될 것을 우려하여 도
성에 주둔한 일본군을 독성산성으로 급파하였다. 일본군은 2만여 명 가운데 일부를 동원하여 오산
주위로 3진을 편성하여 독성산성을 포위하고, 한편으로는 아군을 산성 밖으로 유인하고 다른 한편으
로는 성을 직접 공격해 왔다. 당시 기록으로는 수만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는 그보다 훨씬 적은 수였
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울로부터 내려온 군사와 용인에 주둔한 군사가 결합된 일본군은 오산을 비롯
12) 『宣祖實錄』 卷30, 25年 9月 11日 戊辰.
13) 『宣祖實錄』 卷30, 25年 9月 21日 戊寅. 조경은 임란 전인 선조 22년에 제주목사로 제수되었다가 4월 경상도 우방어사로 활동하다가 7
월 4일 진주목사, 8월에 가평전투의 패배로 파직되었다가 9월 1일 경기감사가 대장으로 임명했다가 수원부사에 임명된다.
14) 趙慶男, 『亂中雜錄』 卷2, 壬辰 9月 22日 및 『晩翠堂實記』 卷2, 「文」.
15) 趙慶男, 『亂中雜錄』 卷2, 壬辰 10月.
16) 李肯翊, 『練藜室記述』 卷16, 선조조 고사본말, 「권율행주지첩」.
17) 趙慶男, 『亂中雜錄』 卷2, 壬辰 10月 및 『晩翠堂實記』 卷3, 「壬辰事蹟」.
18) 趙慶男, 『亂中雜錄』 卷1, 壬辰 7月 9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