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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정의 근왕(勤王) 명령이 하달되자, 5월 19일에 전라감사 이광은 방어사 곽영과 함께 다시
                                                           3)
                  2차로 근왕병 4만여 명을 이끌고 북상한 것이다.  이때 경상감사 김수(金睟)도 1백여 명의 군사를 이
                  끌고 함께 하였다. 두 갈래 길로 북상한 근왕병들은 충청감사 윤선각(尹先覺), 병사 신익(申翌), 방어
                  사 이옥(李沃)과 함께 도내 8천여 명의 군사를 모아 5월 24일 온양에서 만나니, 삼도근왕병이 모두 5

                  만여 명이 되었다.
                    이들은 진위(振威)에서 작전회의를 개최하여 “남도 근왕군은 수원으로 북진하여 남도와 한양 간의

                  통로를 확보한 다음 한양으로 진격한다.”는 결정을 보고 수원으로 북상하였다. 당시 ‘10만대군’ 이라
                  칭하며 북상한 근왕병은 6월 3일 수원에 당도하였다. 당시 수원에는 소수의 일본군이 진을 치고 있었

                  는데, 이들은 조선군의 위세에 압도되어 용인 쪽으로 퇴각하였다. 그리하여 수원을 별다른 싸움 없이
                                                                                         4)
                  탈환하였다. 당시 삼도 근왕병의 병력이 기병과 보병을 합쳐 모두 6만여 명이었다.  처음에 북진할
                  당시 4만여 명에서 더 늘어난 수치다.
                                                                           5)
                    이어 충청감사 윤선각은 경성을 구원하겠다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다만, 수원부 주변의 도로가 일
                  본군에게 막혀 일본군을 제거하되 좌우로 협공하겠다는 작전을 보고한다. 아울러 근왕병을 안산(安
                  山)과 금천(衿川) 방향의 두 길로 나누어 양천(陽川)의 북포(北浦)로 나가도록 약속하였다. 그러나 용

                  인의 일본군과의 전투 패배로 인하여 그러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6월 3일 수원에 도착한 근왕병들은 그 다음날인 6월 4일 전라도 선봉장 백광언(白光彦)은 이미 용

                  인으로 진출하여 적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반면에 충청감사 윤선각은 수원부 앞에 진을 치고
                  유숙하였다. 이 사실은 당시 군사들이 독성산성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수원읍내로 들어갔음을 말해

                  준다. 이윽고 6월 5일 아침에 신익, 이옥으로 하여금 전투할 것을 명하는 한편, 이광, 김수, 윤선각 등
                  은 전쟁터에서 10리쯤 떨어진 거리에 진(陣)을 옮겨 응원할 예정이었다.



                         윤선각이 또 치계하였다. “신이 5월 4일에 수원에서 전라도 군사와 길을 나누어 신은 안산

                        (安山)을 경유하고 이광(李洸)은 금천(衿川)을 경유하여 양천(陽川)의 북포(北浦)에서 회합하기
                        로 약속하였는데, 전라도 선봉장 백광언(白光彦)은 이미 용인에서 적과 서로 대치하였습니다.

                        신은 행군하여 수원부 앞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유숙하였습니다. 5일 아침에 병사(兵使) 신익
                        (申翌), 방어사 이옥(李沃) 등으로 하여금 각각 병마를 거느리고 나아가 전투하도록 하고, 신

                        및 이광·김수 등은 모두 전쟁터에서 10리쯤의 거리로 진을 옮겨 계속 응원할 계획이었는데,
                        신익·이옥 등이 비보(飛報)를 보내 위급함을 알리기에 신이 정예병 2백 명을 뽑아 계속 달려

      오산시사              가 응원하게 하여 3위(衛)가 합력해 싸워 10여 급(級)을 베었습니다.
                         그런데 곽영(郭嶸)의 진영이 적의 침박(侵迫)을 받아 황망히 달아나자, 또 한 부대의 적이 동


      제

      2
      권           3)  서인한, 1987, 『임진왜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76~77쪽. 전라 감사 이광은 전주에서 전라 방어사 곽영과 함께 징발된 군사 4만명
                    으로 2개군을 편성하였다. 하나는 대장 이광, 선봉장 전부사 이지시, 중위장 나주목사 이경록 등 휘하에 20,000명, 다른 하는 대장 곽영,
                    선봉장 전 부사 백광언, 중위장 광주목사 권율 등 휘하에 20,000명이었다.
                  4) 『宣祖實錄』 卷27, 25年 6月 21日 己酉.
    468           5) 『宣祖實錄』 卷27, 25年 6月 28日 丙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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