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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에서 쫓아와서 갑자기 신익을 핍박하니 모든 군졸도 흩어져 버렸습니다. 신의 진중(陣中)에 469
상하(上下)가 아직 아침밥도 먹지 않고 군사들도 미처 정돈하지 못했는데 패전하여 흩어진 양 역사
진(兩陣)의 병졸들이 흙이 무너지듯 와해되어 진영 앞으로 달아나 지나가기에 신이 경악을 금 / 유적
치 못하여 즉시 군관 10여 명으로 하여금 칼을 휘둘러 6〜7명을 참하게 하였지만 그래도 중지
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 유물
신은 다만 군졸 두어 사람들과 진중에 외로이 남아있을 뿐이어서 어찌할 방법이 없어 부득
이 적의 예봉(銳鋒)을 피해 행군하여 갈원(葛院)에 이르렀습니다. 김수(金睟)가 뒤이어 도착하
기에 신이 김수와 평택현(平澤縣)에 이르니 이옥(李沃)이 어둠을 틈타 뒤따라 왔습니다. 신들
이 처사를 잘못하여 이렇게 무너져 패전하게 되었으니 만 번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으므로 행
재소(行在所)에서 거적을 깔고 앉아 주책(誅責)을 기다려야 되겠지만 승세를 탄 적들이 만약
직산(稷山)의 길로 곧장 내려가면 우도가 패망될 것이 염려되었습니다. 이에 신은 병사 신익,
방어사 이옥, 조방장(助防將) 이세호(李世灝) 등과 서울에 가까운 고을에 나누어 주둔하면서
흩어져 도망한 병졸들을 소집하여 뒷일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6)
위의 내용에서 2진으로 나누어 선봉진과 후방진으로 나눠 전투를 전개했던 조선군은 그만 산성에
웅거하고 있는 적을 평지에서 공격하는 전술을 채택하는 바람에 용인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이
에 따라 그 후 충청감사 윤선각은 병사 신익, 방어사 이옥, 조방장 이세호 등과 서울에 가까운 고을에
나누어 주둔하면서 흩어진 병졸을 소집하여 뒷일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나마 근왕군이 수원을 계
속 확보하고 있게 된 것은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제도순찰사 한응인이 평안도 토병(土兵)
을 이끌고 임진강 전선에 출동한 사실을 인지하자 삼도근왕병의 북상 사실을 알리는 동시에 삼도근
왕병과 함께 도성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협공하자고 제의한 것이다.
그러나 6월 5일과 6일에 양일간에 걸쳐 전개된 용인전투에서 삼도근왕병이 일본군에게 대패함에
따라 그 계획은 실현할 수가 없었다. 이 전투는 남도 근왕병 5만여 명이 용인에 주둔한 2천여 명의 일
본군에게 참패를 당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삼남근왕병이 다시 각자의 지역으로 흩어지고 조야
는 크게 실망하였으며, 일본군은 마음 놓고 수원 인근까지 살육과 약탈을 일삼는 일이 벌어졌다.
(2) 김천일의 독성산성 주둔과 활동
용인전투의 대패 이후 6월 23일에는 호남의병장 김천일이 북상하여 수원의 독성산성에 주둔하였
다. 원래 5월 16일 나주에서 창의한 김천일은 그해 6월 3일 수원을 향해 북진하였고, 용인전투에서
패배한 감사 이광이 전주로 복귀할 무렵인 6월 15일에 전라 병사 최원(崔遠)과 함께 더불어 올라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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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에 김천일은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여 6월 23일에 수원의 독산 고성(古城)에 웅거하
6) 『宣祖實錄』 卷27, 25年 6月 28日 丙辰.
7) 전라 감사 이광이 근왕군을 이끌고 북상하고 난 뒤인 5월 26일에 담양의 고경명과 나주의 김천일이 각기 전라 좌우도에서 병력을 모아
의병을 일으키기로 합의하고, 김천일이 먼저 나주지역에서 기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