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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역에 3개의 진영을 나누어 계속 싸움을 걸었으나 권율은 산성을 굳게 지키고 응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면전에 나선 일본군에게 큰 위기감을 느끼게 되자, 권율은 양남도체찰사 정철에게 전세

                  를 보고하는 한편,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정철이 전라도사 최철견(崔鐵堅)과 임희진(任希進)에게
                  속히 수원의 독성산성을 속히 도울 것을 명하자, 도사 최철견과 임희진 등이 의병을 파견하여 구원하

                      19)
                  였다.  또한 권율은 강화도에 머물던 전라 병사 최원(崔遠)에게 독성에 와서 함께 진격하여 일본군을
                  섬멸하자고 수차례 요청하였다. 하지만, 최원이 끝내 응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다.                         20)

                    5일 동안 일본군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권율은 직접적인 교전을 피하며 산성을 견고하게 방어하였
                  다. 일본군은 조선군을 성 밖으로 끌어내어 공격하려고 했으나, 응하지 않은 채 주로 야간에 정예부

                  대인 기병을 파견하고 매복시켜 소수의 적과 진지를 공격하였다. 특히 기병 수백 명이 북문을 열고
                  불시에 돌격하면서 궁시(弓矢)를 적진에 퍼붙고 돌아오는가 하면, 힘 좋은 병사로 하여금 도끼와 창,

                  모극 등을 가지고 요로에 잠복하고 있다가 지나는 일본군을 제거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야간에는
                  거화와 나각으로 적진을 에워 쌓고 소란작전을 펼치는가 하면, 급수와 연료병, 초병, 감시부대 등을

                                                     21)
                  기습하여 적의 후방을 교란하기도 하였다.  또한 의병으로 참가한 최철견은 변사정과 임희진 등으로
                  하여금 독성산성 외곽에서 기치(旗幟)를 높이 들고 금고(金鼓)를 크게 울리며 견제작전을 구사하는가

                  하면, 일본군의 급수원을 차단하는 등 후방에서 농성전을 도우며 괴롭혔다.
                    당시 일본군은 도성에서 용인으로 내려와 오산(烏山)과 다른 지역에 3진으로 나누어 진을 쳤다. 하

                  지만, 설진(設陣)한 구체적인 장소와 진의 형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다음의 기록에서 일본군이 어
                  떤 장소에 진을 쳤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왜적은 진을 치는 데에 능하여 반드시 길가 요충지에서 좌우로 공제(控制)하고 장애가 없이

                        환히 바라보이는 곳에 진을 쳤습니다. 또 높은 산 깊은 구렁이나 암석이 험난한 곳을 구하지
                        않고 다만 산에 초목이 없고 그 형세가 볼록하게 나오고 사면이 민둥민둥하여 막힌 데가 없는

                        곳을 찾아서 진을 쳤습니다. 그러므로 지난날 항복한 왜인도 ‘파주 산성(坡州山城)은 돌을 피
                        할 곳이 없으므로 바라보고서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하였는데, 이것은 실정을 토로한 말이

                        고 헛되어 늘어놓은 말이 아닙니다.          22)



                    위 내용을 통해 보면 독성산성 전투를 위한 산성 주변에 일본군이 배치되었던 모습을 어느 정도 유
                  추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왜적은 진을 치는데 능하여 반드시 길가 요충지에서 좌우를 통제하고, 장

      오산시사        애 없이 환히 바라보이는 곳에 진을 쳤다. 또한 산에 초목이 없고, 형세가 볼록하고 나오고 사면이 민



                  19)  權慄日報體察使徵援 鄭澈馳報全羅都事等 星火進兵救水城之急 都事崔鐵堅邊士貞任希進等 義兵馳援(李肯翊, 『練藜室記述』 卷16,

      제              선조조 고사본말 권율행주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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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           20)  『宣祖實錄』 卷38, 26年 5月 5日 戊午. “司諫院啓曰 訓錬都正崔遠 前爲全羅兵使時 領兵久住江華 終歲退縮 不思討賊 金浦之戰 觀望
                     不進 以致一軍陷沒 巡察使權慄 來屯禿城 欲與協力進勦 屢招不來 終使滿萬之兵 不交一鋒 死亡幾盡 揆之以法 自有其律 尙免刑章
                     已極無謂 請命罷職 上從之.”
                  21) 이형석, 앞의 글, 607쪽.
    472           22) 『宣祖實錄』 卷68, 28年 10月 27日 丙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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