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76 - 제2권
P. 476
의 기운이나 닭과 개 짖는 소리가 간섭하지 않으며, 병기를 저장해 둔 것도 이해(利害)를 논할 수 없
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독성산성은 사도세자가 유숙(留宿)하였던 유적지라는 점
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신중한 태도를 보인 것으로 판단된다.
정조는 현륭원 공역이 한창 진행 중이던 9월 18일 현륭원의 청룡변(靑龍邊) 바위가 보이는 곳에 축
토(築土)가 막혀 있다는 말을 듣고 보이는 곳이 어떠냐고 하문하였다. 이에 김익은 청룡변에 보이는
곳은 독성산성으로 100여 리의 행룡(行龍)이 독성(禿城)을 짓고, 본시 명산(名山)이라고 부르는데 보
이는 곳이 험악하지 않아 보축하여 막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에 정조가 “청룡에 바위가 있는 것
은 백호와 다르다.”고 안심하는 듯한 말을 하였다. 그러자 김익은 “방위로 말하면 이른바 손정방(巽丁
方)의 봉우리요, 수구로 말하면 이른바 묘소에 들어가는 문과 화표(華表)가 함께 매우 길하다.”고 부
연하였다. 김익의 설명에 대해 정조는 “아주 다행한 일이다.”고 하였다. 이렇게 독성산성은 현륭원에
서 ‘보이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현륭원 화소(火巢)의 사표(四標)를 정하는 과정에서 홍범산(洪範山)·
양산(陽山)과 함께 금양지(禁養地)로 설정되었다. 34)
그 후 정조는 1790년(정조 14년) 2월 원행(園幸)에서 독성산성을 친심하게 된다. 정조는 독성산성
운주당(運籌堂)에서 산성의 부로(父老)들을 위로하고 사도세자가 유숙하였을 때의 일을 물으면서 이
야기를 나눈 후 명을 내려 부로들에게 자급을 더 하고 성내의 민호(民戶)는 호(戶)마다 미포(米包)를
지급하였다. 이때의 일은 『일성록』에 다음과 같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정조는 말을 타고 독산산성에 갔다. 중군이 서문에서 기고(旗鼓)로 영접하였다. 서문으로 들
어가서 장대에 올라 경진년 사도세자가 머문 곳을 묻자 서유방이 “이 아래에 운주당(運籌堂)이
경진년에 머문 곳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정조는 곧 여(輿)를 타고 운주당에 이르러 독성중
군 유이주에게 성안의 부로와 승도를 데리고 오라고 명하였다. 정조는 “너희들이 원래 거주하
던 백성으로서 이미 노인이 된 사람이니 경진년 사도세자의 행차를 반드시 첨망(瞻望)하고 기
억할 것이니 각자 모두 아뢰라.”고 하였다. 부로들은 “경진년 온행시에 세자께서 산성에 와서
운주당을 숙소로 삼았습니다. 신 등은 모두 우모(羽旄)를 흔첨하였고, 혹은 직접 옥음을 들은
자도 있으며,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습니다.”고 답하였다.
정조가 “그때의 사적을 혹시 기송하고 있는 자가 있는가.”하고 묻자 부로들이 모두 “세자께
서 오신 날에 직접 신들에게 질고를 물으시고 창고의 곡식을 출연하여 하사하셨으며, 진남루
에 올라가 활 1순을 쏘셨는데, 연달아 4발을 얻었고 다음날 아침 떠나셨습니다.”고 하였다.
오산시사 정조는 “너희들은 거개가 농사를 업으로 하나 무엇으로 생계를 의지하는가? 폐막으로 말할
것이 있으면 일일이 진달하라.”고 하자 부로 등이 “혹은 농업을 일삼아 궁핍함을 면하고, 혹은
상고(商賈)를 업삼아 생애를 이어가기도 하며, 또 혹은 산성에 역을 맡아 요포로 자생하니 성
제
2 은이 함께 가영(歌詠)하는 바입니다.”고 하였다. 정조가 성안의 호수를 묻자 128호라 대답하였
권
476 34) 『顯隆園園所都監儀軌』 卷1, 事實 奏啓 己酉年 10月 15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