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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현륭원을 외호(外護)하는 역할을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정조는 수원부사를 헌관으로 삼고, 중군 479
과 읍내 당상관을 지낸 선천(宣薦) 출신의 조관(朝官)으로 아헌과 종헌으로 삼았다. 향축은 향관이 경 역사
기감영에 가서 전하고, 경기감영에서는 문관(文官) 찰방과 차원을 정해서 전달하게 하면서 대축을 겸 / 유적
하게 하였다. 제사를 행할 때 제품은 전례에 견주어 새끼 양 1마리를 더하고 밥과 떡은 3가지로 하였
으며, 제문은 내각 지제교에게 찬진하게 하는 것으로 식을 정하였다. · 유물
또한 정조는 독성산성의 수축물력을 이미 구획하였으나 부족할 것 같으니 특별히 필역한 후에 경
기감영에 장청하여 획급해 줄 것을 미리 비변사에 알려주게 하고, 시역 일자는 편한대로 정한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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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축을 장청(狀請)하라고 경기감영에 분부하였다. 정조는 독성산성과 현륭원의 관련성을 의식하여
고유제의 절차를 일일이 지시하고 직접 고유문을 지어 독성산성의 고유제는 상당한 격식을 갖고 치
러졌다.
1792년 7월 25일 공역을 시작하여 9월 13일에 쌓기를 마치고 20일 간회를 발라 벽돌을 덮었다. 약
70일가량의 기간에 산성 공역을 모두 끝낸 것이다. 공역의 책임은 수원부 중군 이한흥(李漢興)과 대
솔군관 민광록(閔光祿)이 패를 나누어 동역(董役)하였고, 투입된 인력은 수원부의 속오군과 각색 아
병, 칠색군 등 5,031명이 각 1일씩 부역(赴役)하였으며, 그 외 각색 장수와 모군 등이 있었다. 고가(雇
價)와 들어간 물력은 경기도 순영에서 구획한 1,000냥과 미 100석을 마련하였는데 500냥이 남아서
귀속시켜야 하나 독성산성에는 본래 저축해둔 전포가 없어서 경기도 관찰사에게 품처하여 부족한 자
원을 보충하는데 쓰도록 청하였다. 45)
이때 수축한 독성산성의 규모를 보면, 성의 둘레가 1,004보 내에 신축한 체성이 732보, 수축한 것
이 272보이다. 수문 3곳은 모두 개축하였고, 사태가 난 12곳은 길이 101보, 너비 108보로 돌을 채워
신축하였으며, 여장 309첩 모두를 신축하고 벽돌을 덮어 회를 발랐다. 남장대 6칸은 3척을 안쪽으로
옮겨 이건하면서 단청을 다시 하였다. 4곳의 문 가운데 남문은 8칸 문루를 갖추어 들보 위에 회를 발
랐고, 문의 확쇠 1개를 새로 갖췄다. 서문 역시 8칸 문루의 기와를 수보하였다. 북문과 동문의 좌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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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축을 고치고 문짝 2개씩을 다시 갖췄으며, 서문은 확쇠 1개를 새로 마련하였다. 수축이라 하지만
사실상 신축에 가까운 내용의 공역으로 면모를 일신하였다. 독성산성 수축공역의 감동은 수원부 중
군인 전 부사 이한흥(李漢興)과 대솔군관(帶率軍官) 절충 민광록(閔光祿)이었으며, 실무 담당은 도영
역(都領役) 이정은(李廷殷)과 색리 최기조(崔基祚), 1패장 김천일(金天鎰)과 색리 이무대(李茂大), 2패
장 이진복(李震馥)과 색리 기성헌(奇聖憲) 등이었다.
정조는 성역을 일신하는데 불과 수개월 안에 끝내서 참으로 다행이라면서 시역(始役)할 때 고유제
는 이미 고례를 썼으니 완역(完役)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며 날짜를 가려 설행하는데 제문은 정
조가 역시 직접 지었다. 헌관과 여러 집사는 고유제 때의 예로 하였다. 정조는 감동을 한 중군 이한흥
44) 『日省錄』 正祖 16年 7月 18日 乙卯. “定禿城山城告由祭品及祭文製進之式 仍命修築時 不足之需 自畿營狀請 劃給”
45) 『日省錄』 正祖 16年 10月 3日 戊辰 “水原府使 李敬懋狀啓”
46) 『日省錄』 正祖 16年 10月 3日 戊辰 “城周回一千四步內體城新築七百三十二步 修築二百七十二步 水門三處全數改築 沙汰十二處合
長一百一步 廣一百八步 擔石新築 女城三百九堞全數新築蓋·塗灰 南將臺六間向內三尺移建改丹靑 南門樓八間樑上塗灰 門確金一
箇新備 西門樓八間修補蓋瓦 北門左右改石築 城門二隻新備 東門左右改石築 城門二隻新備 門確金一箇新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