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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建 物 名           規 模              建 立 時 期                       位 置
                        官廳             4.5칸             1805년 建立                   將校廳之西                          역사
                                      大廳 3칸
                        四倉                                                          官廳之西                           /  유적
                                      倉庫 60칸
                        五倉                                                          四倉之東                          · 유물
                     軍器庫(火藥庫)        26.5칸(2칸)          1805년 改建                   五倉之西南
                        武庫              3칸               官廳 所屬                      屬軍器庫
                        西庫                              軍器庫 所屬                         〃
                        東庫                              軍器庫 所屬                         〃

                        保別庫                             軍器庫 所屬                         〃
                        寶積寺            21.5칸             舊 洗馬寺                       東門內



                    독성산성 내에는 사찰이 예전부터 있었을 것인데, 『화성지』에 보적사(報積寺)란 이름이 처음으로
                  기록되었다. 독성산성 성내에 거주하는 승도의 규모는 확인되지 않지만, 건물의 규모로 보아 10여 명

                  내외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승도들은 1790년 용주사 창건 이후 용주사 총섭의 절제를 받는 승군이

                  었다. 1797년부터는 용주사 승도와 같이 15년 이상 거접하면 첩가(帖加)되는 혜택이 주어졌다.                         64)
                    1831년 수축 이후 약 30여 년간은 독성산성에 대한 자료가 확인되지 않는다. 1860년 12월에 수원유
                  수 김병교는 장계를 올려 1831년 수축한 이후 독성산성은 몇 차례의 장맛비로 인해 성첩과 공해 건물

                  이 모두 무너져서 수보하기 위해서 진제곡 가운데 2,000석을 획급하여 주면 1861년 봄에 공역을 시
                                      65)
                  작하겠다고 요청하였다.  조정에서는 요청을 받아들여 독성산성에 대한 수축 공역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독성산성은 1869년 대원군의 분부에 따라 수원부의 마보군(馬步軍) 가운데 200명과 독성산성

                  에서 50명을 뽑아 정군(正軍)을 만들어 삼군부의 지휘를 받았으며 이들에 대한 접제 비용을 충당하기
                                                                                                     66)
                  위해 4만 냥을 특별히 하사하고 총리영 소관의 외탕고 봉부동전(封不動錢) 12,000냥을 배정하였다.
                  이 당시 수원유수 이재원(李載元)은 유수가 상경(上京)하여 자리를 비울 때, 군무(軍務)에 관계된 것
                                                                                                   67)
                  은 전적으로 중군(中軍)에게 위임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의견을 삼군부에 제출하여 승인되었다.  대
                  원군시절 까지만 하여도 독성산성의 군사력이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8)
                    1887년 영의정 심순택은 수원중군을 가선대부로 택정하도록 주청하였고, 고종은 이를 윤허하여
                  수원 중군의 지위는 더 높아졌으나 큰 의미는 없다. 더구나 독성산성은 수원 중군의 절제를 받는 것
                  이었기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다.

                    위와 같이 독성산성은 경기남부의 군사적 요충지로 기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내·외에 수백 호의




                  64) 『日省錄』 正祖 21年 2月 25日 丙申.
                  65) 『日省錄』 哲宗 11年 12月 10日 己巳.
                  66) 『日省錄』 高宗 6年 12月 8日 乙巳.
                  67) 『高宗實錄』 卷6, 6年 9月 乙未.
                  68) 『高宗實錄』 卷24, 24年 2月 癸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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