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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중군으로서 겸대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794년 1월 화성성역이 시작되면서 독성산성 소 485
속 군사들도 성역에 참가하게 되는데, 독성산성 중군 수기(手旗)의 명호를 ‘독성수성장(禿城守城將)’ 역사
이라 정하여 호칭하게 된다. 72) / 유적
1795년 을묘년 원행 때 정조는 화성성역의 기념비를 세워서 기실을 정리하라고 명하고 원행에 대
한 시상을 하였는데, 별감동이었던 독성중군 김후(金㷞)는 임기가 가까워진 곤수(閫帥)자리에 의망 · 유물
73)
하라고 하였다. 이로써 독성중군은 곤수자리로 나아가기 위해서 거쳐야 되는 요직이 되었다. 김후
는 1796년 9월 10일 화성성역이 끝난 날 시상에서 곤수(閫帥)에 임명되었다. 74)
수원유수 조심태가 1797년 상반기 독성중군에 대한 포폄을 올리자 계본을 받아 본 정조는 독성중
군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본 듯하다. 정조는 수원부를 장용외영이라 하고 내영과 외영의 영제에는 중
군이 없는데 예전 방영(防營)일 때 수원부 중군의 칭호를 그대로 쓰고 있으니 명실이 부합하지 않는
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일 수원부가 수미(收米) 속오군이 있어서 덜어 없애지 못하면, 중영(中營)으로
칭호(稱號)하는 것도 맞지 않으니, 독성중군을 어떻게 칭호하는 것이 좋을지 총리대신과 장용외사가
75)
상의하여 초기하라고 하였다. 이 논의는 1798년 10월 제정된 ‘비변사가 아뢴 장용위 외영 5읍 군병
76)
절목’에 따라 독성별장(禿城別將)으로 호칭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동안 임무를 수행해 왔던
본부(本府)의 중군(中軍)과 독성(禿城)의 수장(守將)을 모두 감하(減下)시키되, 독성산성을 지키는 사
람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 독성별장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여 따로 차견(差遣)하였던 것이다. 그리하
여 독성산성 별장은 ‘장용외영 부근 5읍군병 합속절목’에 따라 2,123명의 병력을 지휘하여 화성을 협
수하게 되었다. 77)
그런데 독성산성 별장은 장용내영에서 선발하는 자벽과(自辟窠)로 차출하는 자리가 되었고, 군적
(軍糴)에 관한 일은 외영에 속해 있어서 인신(印信)을 외영에서 조급하였다. 지휘계통에 문제의 소지
가 있었던 것이어서 장용외사 서유린(徐有隣)은 절목을 만들어 독성별장이 부임하게 되면 현륭원 홍
살문 밖에서 숙배하게 하고, 또한 현륭원 재실에 설치한 ‘어진봉안각’을 숙배하는 것을 정식으로 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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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영화도찰방의 예에 따르자는 청을 하였다. 독성산성 별장의 임무를 확실하게 인지시켜 장용외영
의 절제를 받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1800년 정조의 서거로 인해 정조의 정책에 많은 변화가 발생하는 가운데 1801년 독성산성 별장으
로 부임한 유경(劉瓊)이 도임(到任)하였다는 장계를 수원유수 이만수가 올렸다. 이에 대해 조정에서
는 독성산성 별장이 사조(辭朝)하는 직임이 아닌데 사조로 말하는 것이 어떠한지 물으며, 도임장계는
72) 『日省錄』 正祖 18年 1月 8日 丙申.
73) 『日省錄』 正祖 19年 閏2月 12日 甲午.
74) 『日省錄』 正祖 20年 9月 10日 壬子.
75) 『日省錄』 正祖 21年 7月 16日 己未.
76) 『正祖實錄』 卷49, 22年 10月 19日 己酉.
77) 『日省錄』 正祖 22年 10月 19日 己酉.
78) 『日省錄』 正祖 22年 11月 12日 辛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