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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독산성을 천혜의 요새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것이 있다. 산성의 규모가 크지 않고 성내
에 물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규모가 작고 식수가 부족하여 많은 병력이 주둔하기 어렵다는 결함이 있
음에도 불구하고 독산성은 1592년 임진왜란 때부터 조선왕조 내내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되었다. 이
러한 사실은 독산성이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을 만큼 중요한 군사 요새로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독산성에서 찾아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독산
성이 병법에서 제시하는 ‘지리(地利)와 인화(人和)’가 조화를 이루었던 승리의 기억을 간직한 공간이
라는 사실이다. 임란 당시 독산성에서는 지리적 조건을 잘 살려 유격전술로 적의 공격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산성을 중심으로 인근 들판에 국영농장인 둔전을 개척하여 백성들의 민생 문제인 군역과 농
사를 해결하였다.
전통군사학인 ‘병학(兵學)’의 관점에서 지리와 인화의 조화를 이룩한 역사적 사실을 독산성에서 찾
아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다시 말해 이 글은 임진왜란부터 현대까지 400여 년에 걸친 독산성의
연대기라고도 할 수 있다.
2) 오산, 강무와 수렵장으로 활용되다
독산성 주위에는 수원읍성을 비롯하여 수기리성, 요리성, 당성 등이 늘어서 있다. 독산성이 있는
오산의 주변은 고려시대에 이미 4개 역(驛)이 설치되었을 정도로 교통의 요지였을 뿐만 아니라 염불
산, 해운산, 흥천산으로 연결되는 통신망인 봉수를 갖추고 있다. 1456년 집현전 학사 양성지가 세조
에게 올린 상소에 “수원부는 본시 관찰사의 관사를 둔 땅이며, 고려 때에 홍건적이 남하할 때에는 여
기를 경유하여 사통오달할 땅”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독산성이 있는 오산과 수원은 경기도 행정과 교
통의 중심이었다. 자연환경의 변화로 지금은 짐작하기조차 어렵지만 독산성을 싸고 흐르는 황구지천
은 식량과 땔감 등 물자를 수송하는데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그럼에도 조선 초기에는 독산성을 전략
적으로 특별하게 관리했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오산은 태종대부터 국왕의 사냥터이자 전투마를 양성하는 목장으로 활용되었다. 4군 6
진을 개척한 세종도 오산을 강무(講武) 장소로 여러 차례 애용하였다. ‘강무’란 국왕이 친림하여 실시
하는 대규모의 합동 군사훈련을 겸한 수렵대회를 말한다. 세종은 1만 명이 넘는 병력을 동원하여 오
산이나 강원도 횡성에서 군사훈련을 벌였다. 이처럼 오산도 국왕이 세자와 종친을 거느리고 강무하
고 매사냥을 벌였던 수렵장이었다. 『세종실록』에도 오산이 등장하고 있다. “수원부 오산원(烏山院) 들
에서 사냥을 하였고(15년 4월 22일)”, “수원부 동쪽 들판에서 사냥하다가 오산을 거쳐 진위현으로 이
동했다(17년 10월 12일).” 또한 오산의 인근에 있는 수원부 홍원곶(弘原串)은 매년 경상·전라·충청
오산시사
하삼도(下三道) 목장과 제주에서 바친 말 1백 필을 목양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조선 초기의 오산
은 군사훈련을 위한 사냥터이자 후방 보급기지의 역할을 맡았던 지역이다. 조선 초기에는 주로 북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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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독산성과 수원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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