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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애용되었다. 영의정 겸 체찰사 유성룡(柳成龍, 1542~1607)도 독산성을 주목하고 지원을 아끼지 493
않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독산성은 경기도 최고의 요새로 발전되었다. 역사
1593년 10월 당시 『선조실록』에 따르면, 독산성은 경기남부 지역에서 유일하게 방어시설을 갖춘 / 유적
곳이었다. 그러나 독산성을 잠시 비워두었을 때 곧바로 문제가 발생했다. 1594년 가을, 경기도의 일
부 굶주린 백성들이 스스로 무장하여 관군을 공격하고 고을을 약탈했을 뿐 아니라 장수를 죽이는 일 · 유물
까지 벌였던 것이다. 이때 반란군이 독산성에 웅거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자 한양에 있던 선조가
불안에 떨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서둘러 독산성에 방어사를 보내 치안을 유지하고 군사교육을 전담
하도록 조치하고, 창고를 지어 곡식을 저장하고 군기를 제작하였다. 이때 도체찰사 유성룡은 수원읍
성과 독산성을 찾아가 백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주민들의 대부분이 산성을 튼튼하게 쌓고
무기를 갖추면 자신들의 힘으로 가옥을 수리하여 들어가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1596
년 4월, 경기 관찰사 유근(柳根, 1549~1627)이 백성들을 설득하여 독산성을 수축하고 백성들을 모
집해 성안에 불러들였다. 독산성이 안전하다고 인식되자 성안에서 살기를 바라는 백성들이 몰려들
었다. 하지만 성의 규모가 원하는 사람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 성안에 식수가 부족하다는 문제
도 해결할 수가 없었다. 이런 문제점이 있었지만, 독산성은 차츰 경기도를 대표하는 성곽으로 변모
하게 되었다.
독산성이 관민의 주목을 받은 또 하나의 까닭은 국영농장인 둔전을 모범적으로 경영하였기 때문이
다. 군사들이 둔전 경영을 통해 자급자족하는 독산성의 운영방식은 이웃 고을과 다른 산성의 모범이
되었다. 남한산성도 독산성을 모범으로 삼아 둔전을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6) 무예를 시험하다
경상도 해안으로 왜군이 퇴각한 이후 수원읍성과 독산성에서 군사훈련이 이루어졌다. 같은 시기
한양에서는 훈련도감을 통해 삼수군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훈련도감은 왜구 소탕에 혁혁한 전공을
세운 명나라의 장수 척계광이 지은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바탕으로 1594년에 유성룡이 주도하여 창
설한 군영이다. 훈련도감에서 시도한 군대의 조직과 훈련 등 새로운 운영방식은 경기도에도 적용되
어 수원읍성과 독산성에서도 삼수군을 육성하기 시작하였다. 훈련도감의 군제에 따라 지방에는 속
오군(束伍軍)을 창설하였는데, 수원 속오군의 수가 3천 명이다. 삼수군은 활을 쏘는 사수, 총을 쏘
는 포수, 창검을 다루는 살수를 말하는데, 독산성에서도 삼수군을 육성하는 군사훈련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군사교육은 도체찰사 유성룡과 평안도 도순찰사 이원익이 주도하였다. 이때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은 평안도 내의 서원과 향교에 ‘서검재(書劍齋)’를 설치하여 유생을 편입시키고 ‘교생군’이
라 불렀다. 강화도에서도 시행된 서검재의 전통은 숙종시대까지 이어졌다. 강화도는 수원과 함께 국
왕의 호위도 담당했던 곳이다. 독산성에서도 서검재를 운영했던 강화도와 유사한 방식으로 군사훈련
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드디어 1594년 10월, 독산성에서 처음으로 무예시험[試才]을 보았다. 왕명을 받은 시험관이 독산
성을 찾아 군사를 위로하고 무예시험을 보아 우수한 성적을 거둔 무사들에게 상을 내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