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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조정은 무예를 권장하는 정책을 활발하게 펼쳤다. 독산성에서의 무예 시험은 이러한 정책
                  에서 비롯된 것이다. 1602년 12월에는 독산성에서 창검을 다루는 무예를 시험하였다. 병조에서 독산

                  성에서 무예를 시험한 무사들의 성적을 기록한 문서를 선조에게 올렸을 때 선조가 신하들에게 의견
                  을 구했다. “살수(殺手)로서 거수(居首:수석)인 자도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하여 군사들의 사

                  기를 북돋우고 싶다. 그러나 살수를 바로 응시케 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의논하여 아뢰라.” 선
                  조는 거수자를 전시에 바로 응시할 수 있도록 지시하였다. 과거의 최종시험인 전시에 응시하도록 하

                  는 진부전시는 벼슬을 내린다는 의미였다. 독산성에서 무과를 두 차례나 벌였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7) 임진왜란 이후 독산성의 위상이 더욱 높아지다

                    독산성에 주둔하는 군사들의 훈련은 수원읍성에서 이루어졌다. 독산성에 대한 조정의 관심은 계속
                  표명되었다. 1597년 4월 기사를 보면, 수원은 경기의 큰 고을로 양호(兩湖:충청도와 전라도)의 요충

                  지이자 서울의 보장지이고, 또 (독)산성을 지키는 일과 군병을 조련하는 책무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
                  하고 있다. 1601년 3월에는 “수원은 기보(경기도) 중에 가장 큰 고을로서 무인이 거의 1천 명에 이르

                  니, 실로 우리나라의 정예로운 군병이 있는 곳입니다. 전에도 여러 차례 군사를 조련하였고 독산성과
                  같은 요새지도 있습니다.”라는 보고가 올라가고 있다.

                    비변사가 1603년 2월 선조에게 올린 보고서는 특히 주목된다. 독산성을 모범으로 남한산성이 관리
                  되고 있으며, 둔전을 운영했던 사실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군사를 훈련하는 것도 독산성을 모범

                  으로 삼도록 했다.
                    “만약 이곳(남한산성)에다 성을 쌓은 다음 한결같이 독성(禿城)에서처럼 군사를 조련하여 안으로는

                  경도(京都: 서울)의 보장이 되고 바깥으로는 여러 부대를 함께 통제하게 한다면 참으로 장구한 계책
                  이 될 것입니다”

                    비변사가 올린 1610년 1월의 보고문을 통해서도 경기도에서 독산성이 차지하는 위상을 분명히 파
                  악할 수 있다. “경기 지방의 산성이 무려 열일곱 곳이나 되는데 적이 물러간 뒤로 점점 폐지되고 오직

                  수원의 독성만이 꾸준히 수리되어 왔습니다.”
                    1601년 3월에 체찰사 윤두수(尹斗壽, 1533~1601)가 독산성을 충실히 관리할 것을 요청하였다. “경

                  기도 수원에 정예병 1천 명이 있고 독산성과 같은 요새지도 있으니, 성에 병영을 설치하고 명망 있는
                  지휘관을 파견하고 비변사 둔전의 곡식을 제공하여 군사를 양성하면 효과가 좋을 것”이라는 주장이

                  었다. 독산성이 특별히 주목을 받은 까닭은 산성 주위 들판에 국영농장인 둔전을 설치하여 자급자족
      오산시사
                  하는 운영체제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비변사는 독산성처럼 남한산에도 산성을 수축하고 군사를 조련

                  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사관(史官)은 전쟁 직후에 토목 공사를 벌이려는 비변사의 주장을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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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했다. “이전에 백성들이 많은 힘과 돈을 들여 산성과 포루를 축조했으나 정작 왜적이 침입하자 군량
      권
                  과 군기를 모두 버린 채 달아났다. 맹자가 ‘지리(地利)가 인화(人和)만 못하다.’고 하였는데 우리나라
                  사람은 인화에는 힘쓰지 않고 산성을 축조하는 것으로 나라를 보존시키는 계책을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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