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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무덤인 융릉과 정조가 잠들어 있는 건릉을 둘러싸고 있는 수원읍성은 현재 그 형태가                                          491
                  거의 사라지고 겨우 흔적만 남아 있다. 학계에서는 수원읍성을 ‘수원고읍성’이라 부르고 있다. 수원읍                                         역사

                  성이라는 이름 사이에 ‘고(古)’자를 넣은 것은 화성이 있는 현재의 수원시와 구분하기 위해 근래에 붙                                         /  유적
                  인 것이다. 수원읍성이나 독산성과 관련하여 특별히 기억해야할 사실은 또 있다. 융릉이 강무당(講武

                  堂)이 있었던 곳이며 건릉은 무기고(武器庫) 자리라는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두 곳 모두 군사시설이                                          · 유물
                  있던 곳이다. 뒤에 밝히겠지만, 여기에는 북벌을 추진했던 효종과 사도세자와 관련된 특별한 사연이

                  숨어 있다. 융릉과 건릉 앞 평지에 조성되어 있는 아름다운 숲은 본래 수원도호부를 감싸고 있던 읍
                  성 안에 있던 군사 훈련장이라는 사실도 주목된다. 이 또한 독산성과 관계가 깊은 유적이다.



                  4) 임진왜란으로 독산성의 지리(地利)가 주목을 받다

                    임진왜란 당시 경기도는 경상도와 함께 왜군의 피해가 가장 컸던 지역이며 의병들의 활동 또한 가
                  장 활발했던 지역이다. 경기도의 의병들은 왜군 주력이 북상한 후 지역에 남겨진 소규모의 왜군을 상

                  대로 기습전과 유격전을 벌여 보급로를 끊고 후방을 교란했다. 독산성은 경기도의 의병부대가 적극
                  활용했던 곳이다.

                    독산성의 전략적 가치를 여실히 깨닫게 한 전투는 용인전투였다. 용인전투는 지리(地利)의 중요성
                  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1592년 5월, 경상·전라·충청의 5만 대군이 경기도 용인에서 수백 명의

                  왜군에게 대패하는 전투가 벌어졌다. 총대장으로 추대된 전라감사 이광(李洸, 1541~1607)은 왜군이
                  점령하고 있는 한양을 되찾기 위해 도내의 관군을 이끌고 전 부사 이지시를 선봉장으로 삼아 북상했

                  다. 전라도방어사 곽영은 광주목사 권율(權慄,1537~1599)을 중위장으로 삼고 전 부사 백광언을 선봉
                  장으로 삼았다. 경상감사 김수와 충청감사 윤선각도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경기도 진위(평택)에서

                  삼도에서 모인 5만의 병력이 용인으로 향하였다.
                    용인으로 진군하기에 앞서 작전회의가 열렸다. 이때 총대장에 추대된 이광은 용인에 주둔하고 있

                  는 왜적을 먼저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당시 용인에는 수군장수 와키사카 휘하의 군대 1,600명 중 서
                  울에 주둔하는 주력 1천 명을 뺀 600명이 용인 야산에 보루를 쌓아 지키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곽영과 권율은 용인의 왜적은 방어하기 유리한 곳에 진을 치고 있으니 섣불리 공격하지 말고 수원의
                  독산성에 들어가 적을 유인해 싸워 승리를 거둔 이후에 진격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이광은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주장대로 선봉장 이지시와 백광언에게 각각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아군이 진군하자 왜군이 보루를 버리고 후퇴했다. 이에 고무된 아군이 적을

                  쫓아 적진 깊숙이 들어갔을 때 왜적이 갑자기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달려 나왔다. 이 기습 공격으
                  로 선봉장 백광언과 이지시를 비롯한 장수들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 선봉에 섰던 장수들이 전사하자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그사이 급보를 받은 왜군이 서울에서 달려와 1,600명이 되었다. 6월
                  6일 아침, 아군이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때, 백마를 탄 장수를 따라 칼날을 번뜩이며 수십 명의 왜군

                  이 달려오는 것을 본 충청감사 윤선각이 겁에 질려 도망하고 말았다. 장수가 도망치자 삼 도의 5만
                  군사가 “형세가 마치 산이 무너지고 하수가 터지는 듯” 힘없이 무너졌다. 적보다 수십 배 많은 병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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