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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을 얻지 못하면 산성을 쌓아도 별 소용이 없다는 사관의 주장은 분명 옳다. 하지만 남한산성을                                        495
                  요새화하자는 비변사의 주장은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역사



                  8) 행궁을 갖춘 독산성                                                                                    /  유적

                    광해군(재위1608~1623)도 독산성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1593년 겨울에 광해군이 수                                     · 유물
                  원부를 방문하여 읍성에서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1613년 1월, 광해군은 변란에 대비할 요새를 마련

                  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강화도와 마주한 교하(交河, 김포)지역에 “독성산성의 예에 따라 성을 쌓고 궁
                  을 짓고 때때로 순행할 계획”이라며 비밀리에 행궁을 건설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를 통해 임란 전후

                  에 독산성에 행궁(行宮)을 건설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왜적이 다시 침략할 조짐을 보이던 1622년 7월, 광해군은 “하삼도(경상·전라·충청)는 우리나라

                  의 근본으로 삼아야 할 곳이다. 적의 예봉이 삼 도까지 짓밟는다면 방법이 없으니, 수원의 독성과 공
                  주의 금강 등지에 미리 요새를 만들어 굳게 지키어 적의 흉악한 공격을 막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

                  다.”며 시급히 대책을 마련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의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광해군은 수원의 군대도 크게 신뢰했다. 종묘나 성균관에 거동할 때면 수원과 강화에서 병사를 뽑

                  아 자신의 호위를 맡겼다. “수원과 강화의 군사 각 2백 명씩을 징집하여 엄히 호위하게” 하였고, “종
                  묘와 알성의 거동 때에는 수원과 강화도에서 병사를 징발하여 호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내정에 실패하면서 왕좌를 지키지 못한다. 1623년 4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끌
                  어내리고 집권에 성공한 서인정권은 핵심 군사력을 반란을 예방하는데 집중하였다. 그럼에도 한 해

                  뒤에 반정의 주역인 평안병사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 1624년 2월, 이괄의 반군이 한양에 입성하자
                  인조가 한양을 빠져나와 수원 독산성으로 피신했다. 독산성은 수원읍성과 기각지세를 이루는 곳이므

                  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괄의 난을 계기로 경기도 북쪽을 방어하
                  기 위해 총융청(摠戎廳)을, 경기도 남쪽을 방어하기 위해 수어청(守禦廳)을 창설했으며, 국왕을 호위

                  하는 어영청(御營廳)도 창설하였다. 반란은 진압했지만 그 후유증은 컸다. 평안도의 1만 정예 병력이
                  대부분 희생되어 국경을 위협하는 후금(後金) 방어에 공백이 생겼던 것이다. 이를 채우지 못한 상태

                  에서 정묘호란이 일어나고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광해군의 실리외
                  교를 버리고 명나라에 의존하는 사대정책을 펴다가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을 불러들였다.

                    인조반정 이듬해에 일어난 ‘이괄의 난’으로 평안도와 경기도를 비롯한 수도권의 병력은 크게 약화
                  되었다. 인조는 강화도로 들어가려다가 길목을 차단하자 남한산성에 입성했다. 땔감과 식량의 부족

                  으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인조는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 발로 성문을 열고 걸
                  어 나가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항복했다. 후금의 침략에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왕이 항복하는

                  초유의 사태로 인해 조선 군대의 자존심은 크게 상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오산과 수원의 상무정신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인조실록』은 병자호란 직전(1636년 9월)의

                  수원 특별한 사정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삼가 듣건대, 수원부는 호(戶)마다 대오에 편입하여 여리
                  (閭里:마을)에서는 병사가 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합니다. …지난번 관서(평안도와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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