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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구(李廷龜, 1564~1635년)가 1603년에 지은 「진남루중수기」에 의하면 변응성이 성을 높게 쌓
                  고, 도랑을 파고 깊은 샘을 만드는 한편으로 밭을 갈아서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게 하였고, 궁노(弓

                  弩)·석거(石車)·포화(砲火)·기계(器械) 등의 무기들을 설치하여 틈나는 대로 그 군대와 함께 공격
                  과 방어하는 비책과 말달리며 활을 쏘고 격랄(擊剌, 치고 뜀) 등의 기예를 훈련시켰다고 한다. 그리하

                  여 1년 만에 독성산성 내에는 200여 호의 거주민과 사찰이 들어섰고, 관청 건물이 100여 구(區)가 있
                                   38)
                  었다고 기록하였다.  전란 후의 민심이 평지보다는 산성에 거주하는 것이 보다 안전하다는 인식을
                  갖게 하여 많은 사람들이 독성산성에 모여 살았던 것이다.
                    1624년(인조 2년) 경기도의 군대를 재편하여 총융청이 설치되자 수원은 좌영(左營)을 맡아 독성산

                                                                   39)
                  성은 영장이 주둔하는 경기 남부의 군사적 거점이 되었다.  영조 때 편찬된 『해동지도』 「수원부」에는
                  “4대문 가운데 남문과 서문에 누각(樓閣)을 설치하여 우마(牛馬)가 통행할 수 있을 정도이고, 누각을

                  설치하지 않은 동문과 북문은 걸어서 겨우 통행할 수 있을 정도였으며, 성 내에는 51호의 주민이 거
                  주하고 있다. 또한 독성산성에 소속된 군사는 보군(步軍) 및 치중군(輜重軍) 560명, 수첩군관(守堞軍

                                                                             40)
                  官), 별무사(別武士), 궁시인(弓矢人) 등 1,600여 명이 소속되어 있다.” 고 하여 만만치 않은 군사력
                  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85년 경에 편찬된 『수원부읍지』에 기록된 독성산성은 “둘레 5리, 성첩 303첩, 높이 3장의 규모에
                                                                                  41)
                  수첩군 11명, 사령 14명, 위전 13명, 군뇌 4명, 비자 2명”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독
                  성산성은 항상 군사가 주둔하기 위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며, 수축공역이 진행됨에 따라 산성의 규
                  모에도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 1792년의 수축

                    수원부사 이경무(李敬懋, 1728~1799년)는 독성산성이 1792년(정조 16년) 7월 장마에 성첩의 거반이
                  무너져 내리고 산록(山麓) 또한 사태가 많이 났다는 장계를 올린다. 더구나 사태가 난 곳 가운데 원소

                  에서 직접 보이는 곳이 4곳이나 되었다. 정조는 막중한 곳의 보결(補缺) 공역을 조금도 늦출 수 없다
                  며 우선 공석(空石 : 가마니)으로 개복(蓋覆)하고 수거물력은 독성산성에 소재한 향곡 가운데 취모환

                  충차미(取耗還充次米)  100석과 본청유고전 1,000냥을 획급하여 해당 부사가 속히 수보하게 하였다.                          42)
                    곧이어 정조는 독성산성을 수축하도록 명하는데, 공역을 시작할 때 토지신에게 올리는 고유문을

                          43)
                  직접 짓는  한편 고유제의 절차와 참여 인원까지 직접 지시하였다. 고유문을 직접 지은 이유는 독성
                  산성이 현륭원의 외금양지로서 현륭원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였으며, 명목상 독성산

      오산시사



                  38) 『東國輿地志』 및 『華城誌』 卷2, 山城.

      제           39) 『東典考』 卷5, 摠戎廳“…左營將水原[屬禿城]….”(규장각소장 古0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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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           40)  『海東地圖』 「水原府」 禿城山城 “周回八百二十九步 南西兩門有樓閣牛馬相通 東北兩門無樓閣步行僅通 城內居五十一戶 步軍及輜重
                     軍五百六十名 守堞軍官及別武士弓矢人一千六百人”
                  41) 『輿地圖書』 「水原府邑誌」 禿城山城 “周回五里 城堞三百三牒高三丈 守堞軍十一 使令十四 衛前十三 知印九 軍牢四 婢子二”
                  42) 『日省錄』 正祖 16年 7月 10日 丁未. “總戎廳 以水原禿城山城 山麓沙汰處 修補物力劃給啓”
    478           43) 『弘齋全書』 第22卷, 祭文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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