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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 수원부사 우성전은 수원지역의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에 주둔해 있었다. 따라서 수원의 독
                  성산성에서 직접적인 활동을 크게 벌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우성전은 강화도에서 1월 5일에 군사

                                                 25)
                  4백 명을 거느리고 수원으로 떠났다.  아마도 권율이 수원의 독성산성에서 행주산성으로 이동함에
                  따라 공백을 메꾸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권율 휘하 4,000명 가운데 약 1천여 명은 수원지역 인물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같은
                  사실은 다음의 기록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접때 전라도의 사군(射軍) 수백 명이 행주(幸州)에 웅거하여 큰 적을 막아 물리쳤고, 인천산

                        성(仁川山城)과 수원독성(水原禿城)에서는 그곳에 사는 백성이 들어가 지켜서 적이 감히 침공
                        하여 함락하지 못하였으니 (하략).         26)



                    위의 기록은 독성산성 전투에서 전라도 근왕병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역의 백성들도 전투에 참

                  여했음을 말해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권율 휘하의 3,000여 명 가운데 약 1,000여 명은 수원지역의 군
                  사들로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같은 규모의 병력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1592년 9월에 임명

                  된 수원부사 조경과 수원판관 홍계남이 휘하 군사를 이끌고 권율 휘하에 참가했었기 때문으로 짐작
                  된다. 이와 같이 실질적으로 수원부사 조경과 수원판관이 이끄는 약 1천여 명의 수원군사는 순찰사

                  권율이 이끄는 호남의 근왕병 3천여 명과 함께 독성산성 전투에 참가하여 승리를 이끌어냈던 것이
                  다.

                    전라도 순찰사 권율은 독성산성 승리 후 군사 4천 명을 반으로 나눠 절도사 선거이(宣居怡)로 하여
                  금 절반의 군사를 거느리고 양천강(陽川江) 언덕에 진을 치게 하고, 자신은 정병 2천 3백 명을 거느리

                                                                                           27)
                  고 수원의 독성산성에서 고양군(高陽郡) 행주(幸州)의 성산(城山)으로 옮겨 진을 쳤다.  그러다 보니
                  각지의 일본군들은 한양에서 부산까지의 퇴각로를 지키기 위해 각 거점으로 몰려들었다. 특히 이 과

                  정에서 당시 한강 이남의 사평원(沙平院-경기도 광주)에서부터 왜적의 분탕질이 전보다 더욱 극심하
                  여 죽산(竹山)까지 미쳤으며, 충주(忠州)·음성(陰城)·죽산 지경의 적세 또한 아주 컸다.                         28)

                    이 같은 전황(戰況)의 변화로 인해 수원지역을 지키기 위한 조치가 필요해진 것이다. 아마 강화도
                  에 있던 우성전이 군사 4백 명을 이끌고 수원으로 돌아온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독성산성 전투 이후 독성산성은 양천, 행주산성으로 이어진 하나의 큰 연결 방어선을 갖추게



      오산시사


                  25) 『宣祖實錄』 卷34, 26年 1月 5日 庚申.
                  26) 『宣祖實錄』 卷82, 29年 11月 13日 乙巳.
      제

      2           27)  그러다가 1593년(선조 26년) 2월 12일에 행주산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그리하여 흔히 후대에 행주대첩이라는 임진왜란 3대첩의
      권              하나로 평가된다. 이어서 2월 15일에는 충청도 수군절도사 정걸(丁傑)이 수군을 이끌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용산창(龍山倉)에 다다라
                     왜적을 향해 함포공격을 하였다. 당시 강변에 진을 친 일본군이 거의 2만이나 될 정도로 몰려있었다. 그 까닭은 1월 12일 병참업무를 맡
                     고 있던 일본군 3봉행(奉行)은 한양에서 퇴각할 것을 결정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474           28)  원주(原州)의 적은 충주에 와서 모였는데 군량과 마초를 다량 운반하여 탄금대(彈琴臺) 건너편에 쌓아 두었다. 이는 일본군이 퇴각을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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