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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김천일과 함께 했던 인물로는 송제민이 있었다. 8)
호남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하였다. 삼도(三道)의 군사가 무너진 뒤
로부터 기내(畿內)가 완전히 살륙과 노략질을 당했는데, 적에게 붙좇아 도성에 들어간 자도 많
았다. 천일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니, 상이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임명하는 동시에
창의사(倡義使)라는 칭호를 내렸다. 천일의 군사가 수원(水原)에 이르러 독산(禿山)고성(古城)
에 웅거하여 적에게 붙좇은 간민(奸民)을 찾아내어 목을 베니, 돌아와 따르는 기내의 사민(士
民)이 많았다. 9)
위의 기록처럼 김천일이 간민을 잡아 처결하자 돌아와 그를 따르는 지역민이 많았다고 확인된다.
김천일의 수원 주둔이 지역민의 안정과 인심수습에 상당한 효과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던 김
천일은 곧바로 한양 탈환을 위해 강화도로 들어간다. 나주의 김천일 의병장이 주축을 이룬 전라도
3,000명의 의병군이 경기도까지 북진을 하였으며 그 대신 종사관이던 송제민은 수원 독성산성에서
남겨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10)
한편, 용인전투에서 대승한 일본군은 주변의 인근 지역민을 상대로 마음 놓고 살육과 노략질을 자
행하였다. 그러자 공포와 겁에 질린 지역민의 상당수가 일본군에 귀부하여 도성으로 따라 들어가는
한편, 적과 내통하는 백성들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릴
뿐 아니라 조선군에 대한 정보가 누설될 가능성이 높고, 군사 및 군량의 확보 등에 큰 장애가 되었다.
그러자 조정은 신속히 일본군에 귀부한 간민들을 붙잡아 처벌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이었다.
하지만, 이미 용인전투에서 조선의 관군이 크게 패배한 후 일본군에게 자칫 고립될 위기에 처하게
11)
되자, 김천일은 종사관 송제민으로 하여금 충청도 의병의 모집을 지시하였다. 또한 김천일은 독성
산성에 머물며 우선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한 간민들을 처단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자 하
였다.
계속되는 삼도근왕병의 주둔과 활동으로 수원은 그나마 잘 보호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해 9월의
자료에 따르면, 수원은 창곡과 군민이 많아 조정의 기대를 받고 있는 지역으로 확인된다. 이에 그해 9
8) 張維, 『溪谷集』 卷13, 碑銘, 「倡義使金公旌烈祠碑」. “義士 宋濟民, 梁山龍, 梁山璹, 林懽, 李光宙, 徐廷厚 등과 피를 마시며 맹세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金千鎰이 평소에 몸이 약하고 병들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기쁜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내가 칼을
오산시사
차고 말을 타니 거뜬하여 날고 싶다.”고 하였다. 그리고 무너진 군사들도 점차 공에게 돌아와 호서(湖西)에 이를 무렵에는 수천의 병력
을 확보하게 되었는데, 마침내 수원(水原)에 진격하여 진(陣)을 치면서부터 군세(軍勢)가 조금씩 떨쳐지기 시작하였다.
9) 金千鎰, 『健齋先生文集附錄』卷7, 「摭錄」. “六月 湖南義兵將金千鎰領兵北上 自三道軍潰 畿內全被殺掠 多附賊入都 千鎰糾義旅數千
上命授掌隷院判決事 兼號倡義使 千鎰兵至水原 據禿山古城 搜斬附賊姦民 畿內士民歸赴者衆.”
제
2 10) 송병완, 「해광 송재민의 생애과 업적」, 재경 담양군향우회, 2010.
권 11) 송제민의 본관이 충청도 홍주이며 충청도 출신인 토정 이지함(李之菡)의 제자로 일찍이 이 지역의 사대부들과 교분이 있는 점에 착안
하여 의병모집을 지시한 것이다. 이에 송제민은 필마로 충청도로 내려가 토정 이지함의 동문제자인 중봉 조헌(趙憲)과 화천당 박춘무(
朴春茂)를 만나 의병 봉기를 촉구하니 순식간에 2,000명의 의병이 모이게 되었다. 이에 고무된 송제민은 다시 호남지방에 격문을 보내
의병 봉기를 촉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소모 호남의병문(召募湖南義兵文)’이다. 송제민은 이 격문을 돌려 흩어진 의병을 모으는데 열
470 성을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