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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려시대 독산성

                    경덕왕 대에 ‘수성군’이었던 독산성 일대는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수주(水州)로 개칭되며, 13세
                  기에 들어 수원목(水原牧),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격하되기를 반복하는데, 독산성

                  이 이 시점까지 치소로서 활용되었는지 알 수 없다. 각종 고고학 조사를 통해 고려시대 유물이 소량

                  확인되나, 그 양이 현저히 빈약하고 층위적으로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와 관
                  련하여 1999년 한신대학교박물관에서 조사한 ‘수원고읍성(水原古邑城)’이 주목된다.
                    유적은 융·건릉이 위치한 화산 구릉의 남단부에 위치하며, 짧은 구간의 토성벽(土城壁)과 함께 다

                  량의 건물지가 분포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층위조사 결과 상부에서부터 조선시대 전기, 고려시대

                  층이 순차적으로 퇴적되어 있었으며, 고려시대 층과 최하층인 고토양층의 중간에 통일신라 유물이
                  포함된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고려시대 층에서는 직경 2m 정도의 대형 적심이 발견되어 당시 대규
                  모의 관청건물로 추정되고 있다. 출토된 자기류는 고려 초 해무리굽 청자부터 조선시대 후기 청화백

                  자까지 다종다량의 자기류가 출토되었고, 최하층 상부에서 인화문토기로 추정되는 유물이 확인되었

                  다. 이러한 현상은 독산성과 양산동 일원에 위치했던 치소가 어느 시점에 수원고읍성 부지로 이전하
                  였다는 것을 말하는데, 그 이유는 아직 알 수 없다. 이와 같은 현상은 독산성뿐만 아니라 화성 당성,
                  하남 이성산성 등 산성 주변지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지역에서도 관찰되는데, 전반적인 양

                  상에 대해서는 아직 정밀발굴조사와 함께 심층적 연구가 필요하다.

                    더불어 독산성에서 소량이지만 고려시대 기와와 함께 청자 화형 접시 등이 출토되었는데, 최근 발
                  굴조사에서도 동일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몇 가지 가능성을 추론할 수 있게 한다. 첫째는 독산
                  성과 고읍성 일대 치소가 동시에 사용되었으나, 수많은 외침과 독산성의 수개축으로 고려시대 층이

                  모두 삭평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치소는 고읍성 일대로 완전히 이전되

                  었고, 독산성은 배후산성으로서 군사기지가 위치하였거나, 유사시에 피난처로 이용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셋째는 독산성에서 출토되는 청자류가 고품질은 아니지만, 부안·강진산으로 추정되는 유물
                  이 꾸준히 확인되는 점으로 보아 지역 관리나 유지들이 풍류를 즐기기 위한 시설이  입지하였을 것이

                  라는 점이다. 물론 이 세 가지 가능성은 동시에 이루어졌을 수도 있으며, 시기에 따라 달리 이루어졌

                  을 수 있다. 문헌이나 고고학자료 등 직접적인 정황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추론하는 것은 무리
                  가 있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자료를 통해 보았을 때 고려시대에도 독산성이 특정 ‘시설’로서 지속적으
                  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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