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63 - 제2권
P. 463
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463
④번 유물은 대부완으로 보이는데, 경기지역에서 7세기 대부터 등장하는 전형적인 신라 유물이다. 역사
대각의 길이에 비해 완의 기고가 높고 전체적으로 넓은 것이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뚜껑과 같이 세트 / 유적
를 이루면 합(盒)으로 지칭하나 고분 부장품이 아닐 경우 대부분 뚜껑과 따로 출토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대부완이라 한다. · 유물
⑤번 유물은 다리부분이다. 지름이 약 7~9㎝정도로 추정되며 작은 편에 속한다. 두께가 두껍고 외
면의 손질이 아주 잘 되어 있는 편이다. 그러나 상단에 부착되어 있던 부분이 없는 상태로 출토되었
기 때문에 기형이나 문양, 사용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대각 지름이 아주 작고 높이가 낮아서 7세기
이후 신라 유적에서 다수 출토되는 대부완으로 판단되나 이전 시기에 존재하였던 고배류의 대각일
가능성도 있다.
⑥번 유물은 목이 긴 항아리로 추정되는데, 목부분에 동그란 문양이 연속적으로 시문된 것을 보았
을 때, 인화문 토기가 유행하는 통일신라기의 유물로 추정된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독산성 내에
서 출토된 유물은 6세기 중~후반경부터 통일신라 대까지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지역적 맥락을 살펴보면 오산시 관내에서 대략 10개소의 신라~통일신라 유적이 확인되었
다. 그중 가장 이른 시기로 추정되는 유적은 오산 가수동 유적인데, 마을과 함께 흐르는 물을 제어하
는 관개시설과 저수시설, 경작지가 확인되었으며, 유적의 상한은 6세기 중~후반으로 추정되었다.
서경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한 오산 가장동 유적은 두 개 지점에 각각 4기의 집터가 군집한 모양으
로 조사되었으며, 그 외 한 개 지점에서 집터 1기가 확인되었다. 이른 시기로 추정되는 집터는 1단 투
공의 단각고배와 함께 역자(逆刺)형의 화살촉이 출토되었다. 더불어 인접한 집터가 이보다 조금 늦은
시점에 조성된 것으로 볼 때 6세기 후반~7세기 초반에 집이 만들어진 후 일정 기간 사용되었을 것으
로 추정된다. 이 외에도 내삼미동 유적(경기문화재연구원, 한백문화재연구원), 외삼미동 유적(한양문
화재연구원), 세교동 산 41-5번지 유적(세종문화재연구원) 등에서 신라 북진기 이른 시기의 마을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을이 외세의 침입을 받지 않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지역의 방어시설의 존재가 필
수이다. 재지인이 신라의 문화를 수용한 채 살았던 것인지, 혹은 신라 영토에 살던 주민이 이주하여
살았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이들을 보호하고 세금·노동력을 수취하기 위해서는 마을의 교
통망과 통신망, 외침에 대비한 방어책이 마련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보았을 때 오산
지역에 주민들이 안정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방어시설과 군사가 필수적이며, 그 대상지는 오산
독산성일 수밖에 없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보았을 때 오산 독산성 북쪽 치 복원성벽 하부에서 확인된 원성벽은 삼국시대
신라에 의해 축성되었음이 어느 정도 밝혀진 셈이다. 성벽 내부 및 잔존양상은 미흡하지만, 독산성
내부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과 함께 독산성 주변인 오산시 관내 신라 유적의 상황을 통해 추론해 보
면 6세기 중후반 어느 시점에 오산지역은 신라에 편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독산성 내부에서 확
인된 승석문 토기 등의 백제 유물을 근거로 독산성이 백제에 축조된 것이라 보는 견해도 있으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