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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내삼미동 유적 등과 같이 능선 상부에 대규모 수혈군(竪穴群)과 함께 마을이 존재하는 사례가 다
수 확인된 점으로 보아 독산성 정상부에 백제 마을이나 저장시설이 존재하였거나, 현재의 독산성 이
전에 백제 산성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현재로서는 확정할 수 없다. 물론 향후 발굴조사 성과와
고고·역사학 분야의 조사연구 성과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후일의 성과를 기대한다.
3. 통일신라~고려의 독산성
삼국시대 오산지역이 백제의 영역이었을 당시의 지명이나 행정구역명칭은 남아 있지 않다. 고구려
가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매홀군(買忽郡)으로 편제하였는데, 이 매홀군의 위치를 ‘모수국(牟水國)’과
동일시하여 수원시 및 화성시 일대로 보기도 하고, 현재 양주시로 보기도 한다. 553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한 이후 오산지역을 어떻게 편제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지만, 삼국통
일 이후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수성군(水城郡)으로 개칭되면서 오산시 일대는 수성군으로 불리
게 된다. 그렇다면 경기 남부 일대의 산성 분포를 통해 보았을 때 신라가 오산지역을 점령한 후 축조
한 독산성이 수성군의 치소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유적은 한신대학교 박물
관이 1998년에 발굴조사한 오산 양산동 유적이다. 독산성이 위치한 독산(해발 208m)에서 북동쪽으
로 이어지는 능선의 북서쪽 사면부에 위치한다. 비록 경작으로 인해 유적이 대부분 훼손되었으나, 유
적에서 출토된 유물이 상당히 많고 그 질도 다른 유적에 비해 좋은 편이다. 따라서 현재까지 치소와
관련된 유적으로 주목되고 있다.
1) 독산성과 양산동 유적
독산성은 3차례의 학술지표조사와 3차례의 시굴조사, 그리고 2017년부터 현재까지 5차례의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산성 내부 조사에서 확인된 신라~통일신라시대 유물은 많지 않은데, 주목할 만
한 것은 2000년도에 경기문화재단 기전문화재연구원(현 경기문화재연구원)에서 실시한 시굴조사이
다. 당시 북벽의 성외 체성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북문 동벽 외측에 시굴트렌치를 설치하여 조사하였
는데, 그 결과 성벽의 기단부로 추정되는 석렬이 복원성벽 하단 약 4m 정도의 지점에서 확인되었으
며, ‘수(水)’자 명문이 타날된 기와가 출토되었다.
양산동 유적은 산 19-57번지 일원에 위치하며, 발굴조사를 통해 석렬 2기, 수혈 2기, 구상유구 1
기 및 주공군 등이 확인되었다. 유구는 큰 특징이 없으나 중요한 것은 유구에 비해 토기, 철기, 석제
품 및 토제품 등의 내용과 품질이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오산시사 토기는 6세기 중후반에서 8세기에 걸친 기종이 확인되었으며, 대체적으로 8세기 기종이 중심을 이
룬다. 이른 시기의 유물은 대각의 투창이 시문된 단각고배류 등이며, 통일신라의 대표적 토기인 인
화문토기는 다양한 문양들이 확인되었는데, 7세기 전반에서 8세기대까지 유행하는 문양들이다. 토
제
2 기의 수량이나 재질은 오산시 관내에서 확인된 유적들 중 상당히 높은 위치를 보이는데, 특히 문자가
권
시문된 토기들이 주목된다. 명문은 ‘화산(華山)’, ‘염(塩)’,‘천(川)’, ‘수□(水□)’, ‘정(井)’, ‘란(卵)’ 등으로
그 중 ‘수’자는 독산성에서 출토된 명문기와와 같은 성격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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