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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활을 잘 쏘는 사람이 몇 사람이냐고 묻자 본읍 장교와 아울러 활을 잡은 자는 30여 인이라 477
하였다. 역사
정조는 부로들을 접견한 후 “지난 경진년 온행 시에 세자께서 산성 숙소에 머물러 진남루에 / 유적
올라 1순의 활을 쏘아 연이어 4시를 얻었으며, 부로를 불러 질고를 하문하셨다. 지금 나는 31
년 후에 이 성에 임어하여 이 운주당에 앉아 민인을 불러 보고 자세하게 옛일을 물으니 대답 · 유물
이 창상(創傷)을 깨닫지 못함은 나의 추술지도(追述之道)에 있다. 어찌 뜻을 보이는 거조가 없
겠는가? 입정(入庭)한 부로들은 모두 경진년 온행 시에 두터운 은전을 입은 자이니 승속(僧俗)
과 나이를 불문하고 특별히 한 자급을 더해주고, 성안의 민호마다 미포를 지급하여 오늘의 우
감하는 뜻을 보이라! 독산산성 중군 유이주는 상당직으로 승서하고, 영접군교는 본도에 영을
내려 시상하라. 조궁지류는 내일 뒤쫓아 대령할 것이로되 득중(得中)하면 직부(直赴)하여 함께
창방(唱榜)할 것이니 이로써 분부하라.”고 하교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내일 장옥(場屋 : 과장
(科場)에서 햇볕이나 비를 피하여 들어앉아서 시험을 칠 수 있게 만든 곳)에서 산성 사람들은
마땅히 소포(小布)를 별설하라. 이것은 경진년의 옛일을 추념하는 뜻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정조는 진남루에 올라 지방관 조심태에게 하교하여 말하기를 “이 (진남)루의 기문은
마땅히 본부에서 제하하는데 편한대로 고쳐 짓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그 후 정조는 여
를 타고 서문으로 나가 여에서 내려 말을 타고 수원 득중정에 이르렀다. 35)
위의 행적을 통해 1790년 2월 정조의 독성산성 친심은 풍수적 문제뿐만 아니라 사도세자가 1760년
에 행차하여 펼친 사적(事蹟)을 직접 확인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머물렀던 독성산성 곁에 현륭원을 천봉하였다는 점에서 감회가 컸을 것이다. 그리하여
독성산성은 풍수적 문제에 관계없이 일단 산성을 그대로 남겨두되 대대적인 수축(修築)을 고려하지
는 않았던 듯하다. 2년이 경과하도록 아무런 조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3. 독성산성의 수축
1) 임진왜란 이후의 수축
독성산성은 임진왜란 중에 경기관찰사 유근(柳根, 1549~1627년)에 의해 4일간의 공역으로 한 차
36)
례 수축된 적이 있다. 그러나 공역이 너무 단시간에 급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곧 허물어졌던 것으
로 보인다. 전쟁이 끝난 후인 1602년(선조 35년) 수원부사를 폐하고 방어사(防禦使)를 설치하면서 변
응성(邊應星)을 방어사로 임명하여 석성(石城)으로 수축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37)
35) 『日省錄』 正祖 14年 2月 10日 辛酉. “駕詣禿山山城還次水原府”
36) 『宣祖實錄』 卷55, 27年 9月 19日 甲午.
37) 『華城誌』 卷2. 「山城」 禿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