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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언급했듯이 정조가 남한산성을 방문하기 전에 산성을 크게 보수했는데 이 사업은 남한산성                                          501
                  을 관할하던 수어사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이 주관했다. 남문인 지화문(至和門)과 북문인 전승                                      역사

                  문을 비롯한 사대문을 새로 건축하고 서명응이 편액까지 썼던 사실을 통해 공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  유적
                  있다. 남한산성을 둘러 본 정조는 수어사  서명응에게 이렇게 반문했다.

                    “이곳의 형승은 천험(天險)이라 할 수 있다마는, 무비가 닦이지 않아서 한 번 전란을 당하면 수습하                                       · 유물
                  지 못하니, 어찌 지리(地利)가 부족한 것이겠는가?”

                    남한산성의 지리적 조건이 매우 좋지만, 무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에서 패배한 것
                  이라는 진단이다. 그렇다면 강한 외적이 공격해도 허물어지지 않는 튼튼한 성곽을 어떻게 쌓을 것인

                  가? 정조는 이에 대한 비결을 인화(人和)에서 찾았다.


                  3) 신작로로 지리를 확장하다

                    욱일승천하는 청나라의 저력에 군사력이 뒷받침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정조는 팔기제도와 성

                  곽제도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1780년 11월 북경에서 돌아온 부사 정원시에게 물었다.
                    “그 나라의 성곽과 참호의 제도가 어떠한가?”

                    “황성(皇城: 자금성)은 주위가 가로로 뻗쳐 있어 몇 리나 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큰 바위를 다듬
                  어서 네 모퉁이에 이를 맞물려 (성벽을) 쌓았고 돌이 맞물리는 틈에는 용철로 가운데를 꿰뚫었으며,

                  외면에는 유회를 발라 전연 틈이 없었습니다. 높이는 10장이 넘었고 넓이는 다섯 필의 말을 용납할
                  수 있었습니다.”

                    정조는 즉각 실천으로 옮겼다. 사신들이 입수한 정보 중에서 조선에서 실행할 만한 제도는 중앙의
                  군대인 오군영에서 먼저 적용해 보도록 지시했다. 성곽에 벽돌을 사용하는 것도 군영에서 먼저 실험

                  하여 성능과 비용을 면밀하게 살피도록 하였다. 정조는 청나라의 우수한 제도를 여럿 모방했는데 그
                  중 하나가 도로였다. 당시 조선의 일반도로는 폭이 좁아 수레가 다니기 힘들었다. 1789년 정조는 현

                  륭원을 조성하면서 한양에서 수원으로 이어지는 신작로(新作路) 곧 시흥대로를 건설하였다. 『원행을
                  묘정리의궤』를 비롯한 기록화에서 12명의 병사와 다섯 마리 말이 가로로 나란히 시흥대로를 행진하

                  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정조의 지리에 대한 인식과 개혁정신을 담고 있는 시흥대로는 현대에 1번 국도
                  가 되었다.



                  4) 지리의 온전한 활용법

                    1779년 8월 9일, 정조는 남한산성 서장대에 올라 주간 군사훈련인 성조(城操)를 지휘했다. 성조 후
                  정조는 대신들과 수어사 서명응과 동행하여 성 안팎을 둘러보며 지리의 이로움과 유비무환을 강조하

                  면서 지리와 인화를 말했다.
                    “성이…참으로 급할 때에 믿을 만하다마는, 당초에 한번 적과 결전하지 못하고 마침내 성이 떨어지

                  는 치욕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대개 지리(地利)를 믿을 만하지 못한 것이 이와 같다. 그러나 …지리와
                  인화(人和)가 다 그 마땅한 것을 얻었다면 어찌 청나라 군대를 걱정하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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