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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정치의 근본이 되는 줄을 알지 못하여, 관문의 방비는 허술하다는 탄식이 많고, 성곽과 성지는 수                                        503
                  선하는 효과가 없으며, 서울을 보호하는 주목의 병권은 묘당의 의논이 진퇴가 무상하고 강화도의 통                                           역사

                  어영 제도는 중론의 가부가 한결같지 않느냐? 울릉도와 손죽도는 오래도록 무인도로 버려졌고, 여연                                            /  유적
                  과 무창은 아득히 옛 군현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정조는 ‘지리가 정치의 근본’이라고 단언하며 지리를 정치로 연결하였다. 지리에 대한 관심을 확장                                         · 유물
                  하면 국방으로, 국토 관리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지리는 정치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정조는 조선의

                  성곽이 허술한 것은 지리에 대한 인식이 깊지 못하기 때문이라 진단하였다. 정조는 세종이 개척한 4
                  군 6진의 관리조차 부실한 현실을 탄식하였다. 관리들이 지리에 대한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국토는 잘 관리될 것이고, 울릉도를 비롯한 섬이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섬으로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
                  는 통렬한 지적이다. 아울러 정조는 국토를 잘 활용하여 민생을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 정밀한 지도를

                  제작할 필요를 강조하였다.


                  7) 정조가 세 번이나 성을 쌓은 까닭

                    재위 24년 동안 정조는 성곽을 보수하거나 신축하는 토목공사를 세 차례나 벌였다. 1779년(재위 3

                  년)에 남한산성을 개축하고, 1792년(재위 16년)에 독산성을 보수했으며, 1794년(재위 18년)부터 1796
                  년까지 화성을 건설하였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한산성과 세마대가 있는 독산성도 정조 시대에

                  수리하고 새롭게 쌓았다. 당시 동아시아는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대였다. 이러한 시기에 정조가 산
                  성을 수리하고 새롭게 성곽을 쌓도록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정조는 재위하는 동안 “평화로운 시대에 위태로움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여러 차례 실시했다. 이러한 정조의 국방철학은 군제개혁으로 나타났다. 정조는 “문(文)과 무(武)는

                  새의 두 날개와 같은 것”이라며 규장각과 장용영을 통해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뛰어난 활쏘기 실력
                  과 풍부한 군사지식으로 상무적 기풍을 확산시켰던 정조의 문예부흥은 장용영으로 상징되는 강력한

                  무력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 후기의 왕들은 모두가 독산성과 남한산성, 강화도의 관리에 정성을 쏟았다. 세 곳은 모두 한

                  양을 보호하는 요새이고, 유사시에는 국왕이 머무를 수 있는 행궁을 갖춘 피난처였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은 한 번도 함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오랫동안 치욕의 공간으로 기

                  억되었다. 효종의 120주기를 당해 영릉을 참배하는 길에 방문한 남한산성에서 정조는 병자호란 당시
                  산성에서 벌어진 일들을 깊이 성찰했다. 1779년 8월 7일, 정조는 남한산성 서장대에 올라 주위를 둘

                  러보며 자신을 수행하던 수어사 서명응에게 이렇게 토로했다.
                    “이곳의 형승(形勝)은 천험(天險)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무비(武備)가 닦이지 않아서 한 번 전란

                  을 당하면 수습하지 못하니, 어찌 지리(地利)가 부족한 것이겠는가?”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남한산성의 사대문은 수어사 서명응이 새롭게 단장한 것이다. 사대문을 수

                  리하고 난 뒤에 서명응은 사대문의 이름을 새로 붙였다. 동문을 좌익문(左翼門), 서문을 우익문(右翼
                  門), 북문을 전승문(全勝門), 남문을 지화문(至和門)이라 이름 짓고 현판을 손수 써서 걸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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