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7 - 오산문화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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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VOL. 68  osan culture








              니었다. 누나가 상처 받을 것을 뻔히 알고도 지금                  살아보든 네 뜻대로 했으면 좋겠어. 사랑해 카멜
              당장 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 내뱉은 말이란                    레온.’
              것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눈물이 눈앞을 가렸지만 눈물을 닦아 내리며 계
              는 곧바로 말했다.                                   속해서 쪽지를 읽어 내려갔다.

              “…….누나 미안해. 내가 너무 예민해져서.”                    ‘아 그리고 너와 만나자마자 전했어야 했던 얘기인
              누나가 답했다.                                     데. 엄마가 네 전화를 받고나서 대성통곡하시면서
              “아냐 카멜레온, 내가 너무 무심하게 말했지? 미                  우셨어. 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해.”                                         어느새 눈물만이 아닌 콧물도 같이 흐르기 시작했

              누나와 나는 내일 오전 시간에만 같은 시도를 해                   지만 쪽지를 읽어 내려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보고 오후 시간에는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것으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네 모습을 보고 싶어 하셨
              로 의견을 모았다. 그렇게 그 날 하루를 정리했다.                 지만 네 모습을 보게 된다면 감정이 북받쳐 올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집을 돌아다니며 누                  라 네게 기억을 찾는데 도움을 주기는 커녕 오히

              나를 찾아보았지만 누나는 온데간데없고 작은 쪽                    려 독이 되실까봐 나에게 대신 만나서 도와주라
              지 한 장만이 남겨져 있었다.                             고 부탁하셨거든. 아빠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
              ‘카멜레온, 누나가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한 것 같                  게 조용히 눈을 붉히시며 우리 모녀의 모습을 묵
              아 미안하네. 하지만 누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자                   묵하게 지켜만 보셨고.’

              신 있게 답할 수 있을 것 같아.’                          엄마, 아빠 그리고 누나와의 추억과 기억은 없었지
               누군가 심장을 찌르는 것처럼 갑자기 가슴이 미                   만 우리 가족은 나를 매우 사랑한다는 것만은 변
              어지기 시작했다.                                    함없는 사실이라고 느껴졌다. 가족과의 소중한 추
              ‘이렇게 쪽지를 남기고 사라진 이유가 궁금할 텐                   억과 기억이 없다는 사실에 화가 매우 치밀어 올

              데. 어제 네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똑                   랐고 기억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나의 처지에 다
              같은 시도를 해본다는 것은 꽤나 바보 같은 짓인                   시 한 번 내가 너무 한심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것 같더라고. 그래서 네가 똑같은 시도를 하는 것                  ‘카멜레온 , 다시 한 번 말할게 정말 사랑해. 우리
              보다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것이 훨씬 낫다고 판                   꼭 살아서 보자.’

              단을 했고 네가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게 하려면                  무엇이 눈물이고 무엇이 콧물인지 가늠이 안 될
              내가 사라져야 된다고 생각했어. 내가 있으면 네                   정도로 얼굴은 눈물콧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가 내 눈치를 볼게 불 보듯 뻔했거든.’                       리고 나는 눈물과 콧물을 닦으며 결심했다. 타인
              눈에서 조금씩 따듯한 물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이 봐왔던 모습으로 살면서 운좋게 기억을 찾아

              ‘네가 똑같은 시도를 해보든, 새로운 시도를 해보                  내 살아가는 것이 아닌 쪽지를 쓴 의문의 사나이
              든, 기억 찾는 것을 포기하고 남은 여생을 즐겁게                  로부터 도망쳐 꼭 살아남아 가족과 행복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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