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0 - 오산문화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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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인문학기행









           청곡사는 진주시 금삼면 갈전리 월아산에 있는                     왜란의 전적지로 1592년(선조25) 10월 5일부터 10
           조계종 제12교구 본사 해인사의 말사이다. 879년                 일까지 진주성에서 김시민장군이 조선군과 의병
           (신라 헌강왕5)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 월아산 남                 을 이끌고 왜군들과 전투를 벌여 격파한 전투인
           쪽 남강변으로 청학이 날아오니 서기가 충만하였                    진주성대첩은 이순신장군의 한산도대첩, 권율장

           으므로 이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이후 1380년                 군의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첩으로 일
           (고려 우왕6) 실상사의 상총이 중건하였으며, 임진                 컬어진다. 이때 김시민장군은 적 탄환에 맞아 부
           왜란에 완전소실된 것을 1602년(조선 선조35) 계                상을 당하며, 끝내는 회복하지 못하고 며칠 후 순
           행과 극명이 중건하였다. 1612년(조선 광해군4) 대               절하고 만다. 충무공의 시호가 내려졌다. 백제 때

           웅전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양 출신                   거열성터였다고는 하지만, 이 진주성을 언제 축성
           이기도 한 신덕왕후가 태조의 왕비가 된 것을 기                   했는지는 모르고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등 사료
           리기 위하여 상총이 이 절에 머물면서 대장경을                    에 의하면 고려 우왕 3년에 고쳐 쌓았다고 한다.
           인성하였고, 이에 김사행 등이 동조하여 괘불함                    이 진주성이 임진왜란 때 곡창지대인 호남으로 진

           (향로)을 만들었다. 괘불함은 경남 유형문화재 제                  출하려는 왜적을 막아냈던 관문이었다. 이 진주성
           26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존재로 인해 호남의 벼 수확물을 보호했기에, 임
           있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묘사한 국보 제302                  진왜란을 유리하게 막아낼 수 있었던 큰 요인 중
           호로 지정된 괘불掛佛은 1722년(조선 경종2)에 조                하나가 된 것이기도 하다.

           성되었는데, 매우 섬세하고 채색이 좋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진주성 북문인 공북문 안. 사진 남경식

                                                        1차보다 5배나 많은 왜적들이 쳐들어온 2차 진주
           청곡사 내. 현지 문화관광해설사로부터 청곡사 탑에 대해 해설을           성전투로 결국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2차 진주성
           듣고 있다. 사진 남경식
                                                        전투는 오산시 독산성을 거점으로 본격적인 군사

           진주성은 진주시를 찾는 관광객이 제일 먼저 찾는                   활동을 전개하고 유격전으로 독산성을 지킨 수

           곳이다. 그만큼 진주시의 얼굴 역할을 한다. 임진                  원부사 출신이기도 했던 의병장 김천일장군이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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