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8 - 오산문화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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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인문학기행
회, 기독교인순교탑 등이 있다. 는 은행나무가 서 있다. 영광의 3·1독립만세운동
은 1919년 3월 10일의 광주에 이어 광주, 전남권에
마지막 코스로 이 인문기행의 주제이기도 한 영광 서는 두 번째로 3월 14일에 전개되었다. 이렇게 다
3·1독립만세운동지 1차 발원지 영광향교靈光鄕 른 지역에 비교하여 곧바로 3·1독립만세운동이 전
校(당시 영광보통학교)를 찾았다. 1985년 2월 25 개된 것은 위계후, 조철현 등과 같이 신교육을 받
일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25호로 지정되었다. 고 은 민족의식을 자각한 인물들이 주도했기 때문이
려시대 공민왕 때 창건되었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 다. 이들은 3·1독립만세운동을 통해 새로운 항일
다. 당시 향교의 위치는 지금과 달랐던 것으로 추 운동 주도층으로 1920년대 이후 영광의 사회운동
정된다. 1465년(세조 11) 봄에 관사를 준공하였다 을 주도하였다. 3월 15일에는 영광경찰서까지 진입
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향교도 이 무렵에 같 했고, 서울에서 귀향한 조철현, 류일과 고종 국장
이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582년(선조 15)에 에 참여한 노준 일행, 영광에서 독자적으로 거사
중창되었다. 건물들은 동서로 긴 직사각형의 평 계획을 가진 영광보통학교 교사 이병영 등과 학생
탄한 대지 위에 일반적인 전묘후학의 형식으로 배 들 그리고 정인영, 정헌모 등이 처음부터 합세하
치되었다. 외삼문 내 앞쪽에 문묘공간인 대성전이 여 실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주도 속에서 이
있으며, 대성전 앞쪽에 좌우로 동무, 서무가 대칭 틀 동안 거의 1,000여 명 이상의 대규모 군민들
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성전 뒤쪽으로는 강학공 이 대대적으로 합세하여 매우 치밀하게 실행하였
간인 명륜당이 있고, 명륜당 앞쪽의 오른쪽에 동 다. 영광의 3·1독립만세운동은 영광경찰서에 진입
재가 있다. 원래는 서재도 같이 있었으나 재건되 하며, 강도 높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에 놀란 일
지 않았다. 현재의 건물들은 조선 후기에 건립한 제는 군대까지 동원하여 1차 3·1독립만세운동을
것으로 추정되며, 정문 앞에 있는 만화루萬化樓 탄압했다. 이후 영광 전 지역을 철저하게 감시하
는 근년에 소실되고 나서 1987년에 복원한 것이 고 차단하였다. 그럼에도 3·1독립만세운동은 3월
다. 향교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서울 성균관이 15일 이후 영광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영
1400년(정종 2)에 화재로 소실되자 1407년(태종 7) 광의 3·1독립만세운동에서 영광공립보통학교, 법
복원하면서 영광향교의 배치를 참고하였다고 한 성공립보통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주도적이었다.
다. 공자, 안자, 자사, 증자, 맹자의 오성五聖과 유 그리고 영광대교회는 3·1독립만세운동 참여교회
교 숭상 인물 22명의 위패를 모시고 해마다 봄가 (100주년 기념)로 공식 인정받았다. 기독교인의 적
을에 제를 지내고 있으며, 대성전 앞쪽으로 수령 극적인 참여가 있었다.
이 600년 정도 되는 은행나무가 있고, 명륜당 앞
에는 480년 정도 되는 비자나무와 500년 정도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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