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4 - 오산문화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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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인문학기행









           한용운선생생가지와 김좌진장군생가지가 있는                       여 일제강점기의 민족혼을 일깨웠다. 그리고 불교
           홍성군은 인구 10만 1천여 명의 도시이다. 충남의                 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1919년 불교계 대표로 3·1
           도청소재지이기도 하다. 내포신도시(홍성군+예산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66세를 일기로 입적
           군)에 도청건물이 있다. 홍성은 옛날 홍주성이라                   하였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

           불리었다. 또 충절의 고장이다. 최영, 성삼문, 한                 었다. 생가터가 복원되었다.
           용운, 김좌진 등이 태어난 도시이다. 또 한국무
           용의 한성준, 근대화단의 거목 이응노 등 뛰어난                   김좌진의 호는 백야, 본관 안동. 병자호란 때 강
           예술인도 배출한 곳이다. 홍주성 안에 홍성군청                    화도에서 순국한 김상용의 10대손인 김형규의 둘

           이 자리 잡고 있어 조선시대 관아와 함께하는 특                   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좌진장군생가지는 갈산
           별한 곳이다. 홍성의 용봉산은 제2의 금강산으로                   면 행산리에 복원되었다. 김좌진이 태어나 성장한
           불리며, 산의 이름처럼 거물 등이 많이 배출된 도                  곳이다. 김좌진은 어려서부터 공부보다는 말타기
           시이다.                                         와 전쟁놀이를 좋아했다고 한다. 15세 때인 1904

                                                        년에는 노복 30여 명을 모아 놓고 그들 앞에서
                                                        종 문서를 모두 태우고, 농사짓고 살만큼의 논밭
                                                        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용력이 뛰어났으며, 18
                                                        세 때 호명학교를 세워 신문학을 교육하기도 하였

                                                        다. 1916년이 되면 광복단에 가입하여 격렬한 항
                                                        일 투쟁을 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권
                                                        고로 북로군정서로 개칭하고, 소속 무장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 편성에 주력하였다. 1920

           한용운생가지에서 기념촬영. 사진 유영희                        년 10월 청산리대첩은 그의 최대 업적이다. 1925
                                                        년 3월 신민부를 창설하고 군사부위원장 및 총사
           시인, 독립운동가, 스님이기도 하였던 한용운은
                                                        령관이 되었다. 1927년 많은 간부가 일제에 붙잡
           본관 청주. 1879년 결성면의 박철동에서 한정옥의
                                                        히자 신민부를 재정비해 중앙집행위원장으로서
           이름을 갖고 태어났다. 14세가 되어 결혼하였으
                                                        신민부를 통솔하였다. 1930년 공산단원 박상실에
           나, 16세에 돌연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암에서 스
                                                        의해 총격당하여 사망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님이 되었다. 이후 하산하여 시베리아와 만주 등
                                                        장이 추서되었다. 일제강점기 협객 김두한은 그의
           지를 떠돌다가 27세가 되던 1905년에 설악산 백담
                                                        아들이다.
           사에서 연곡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득도하였다. 법
           명은 용운이다. 1926년 시집『님의 침묵』을 출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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