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0 - 오산문화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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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인문학기행
4월 17일 제천장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은 제천 민들이 일제의 총칼 앞에 목숨을 잃었다. 21명은
이 횡성, 원주, 영월, 단양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하 부상한 것으로 나타났다. 48명의 주민은 체포돼
였다. 이미 의병의 본거지로, 을미·정미년 의병 양 유치장에 구금이 됐다. 제천지역의 시위자 수는
성소이자 이들 의병들의 양식과 무기·경비 등을 2,900명으로 나타나 있다.
지원하는 병참기지인 제천지역은 일제에게는 골칫
거리였다. 일제는 제천지역의 기능을 마비시키지 영월의 동강사진박물관은 국내 최초 공립사진박
않는 한 의병활동은 지속될 것으로 판단했다. 그 물관이다. 2005년 7월에 개관하였으며, 국내 최초
래서 내놓은 대책이 제천읍내 시가지를 불태워 없 사진마을 선언을 통해 사진의 고장으로 영월이 거
애버리는 소개작전이었다. 일제는 당시 제천주민 듭 낫다. 영월군청 앞 부지에 세워진 박물관은 3
모두가 의병과 다름이 없다고 단정하고 근거지 말 개의 전시실과 야외전시장, 사진체험실을 갖추고
살을 위해 불을 질렀다는 것이 학계의 정론이다. 문화기반시설로 박물관고을 역할을 수행하고 있
일제의 야만적 보복행위로 제천시가지는 불태워 다. 박물관 소장품은 1950~90년대 사이 우리 삶
져 완전히 폐허가 됐다. 당시의 참혹한 현장은 종 의 모습을 진솔하게 기록한 다큐멘터리 사진을 비
군기자였던 영국 데일리메일신문의 특파원인 F·A 롯하여, 2002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동강국제사진
매킨지 기자가 증언했다. 당시 그가 송고한 기사 제에 참여한 작가의 사진, 강원다큐멘터리, 영월
는 “···이렇게까지 한 도시가 완전히 파괴된 것을 군민 기증 사진 등 1,500여 점의 사진과 130여 점
이전에 본 일이 없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번 의 클래식 카메라를 소장하고 있다.
화했던 거리였는데 그것이 지금은 시커먼 잿더미
와 타다 남은 것들만이 쌓여있을 따름이었다. 완 나주목의 객사 정청 금성관 앞에서 기념촬영. 사
전한 벽 하나, 기둥 하나, 된장항아리 하나 남아 진 차상현
있지 않았다. 제천은 이제 지도위에서 싹 지워지
고 말았다.” 고 참혹성을 생생하게 보도 고발하고
있다. 제천의 의병 정신은 100년 전인 1919년 제천
장독립만세운동으로 계승됐고, 이 만세시위는 제
천지역이 일제에 의해 완전히 불태워진 12년 뒤에
일어났다. 당시 제천지역은 화마로부터 제대로 복 동강사진박물관내 설치물 카메라 프레임 틀을 이용하여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인문기행팀. 사진 남경식
구조차 되지 못한 상태였다. 모두 일곱 차례에 걸
친 독립운동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살상된 전· 영월군의 청령포는 단종의 유배지이다. 단종은 제
후기 의병활동에 이어 또 다시 16명의 무고한 주 5대 문종의 아들이다. 어머니 현덕왕후는 단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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