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8 - 오산문화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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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인문학기행









           조선 때까지 큰 고을에 두었던 지방행정 단위였던                   봉기, 이듬해 2월 10일 2차 봉기 등에 이르기까지
           ‘목(牧)’에 대한 이야기를 알 수 있는 곳이다. 고려               항쟁을 계속하였다. 이에 30명의 학생들이 퇴학을
           성종 때는 12목, 고려 현종 때는 8목, 조선시대는                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이 항일운동은 우리나라
           20목이 설치되어 있었다.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나주목의 객사 정청 금성관 앞에서 기념촬영. 사
                                                        진 차상현













           나주목의 객사 정청 금성관 앞에서 기념촬영. 사진 차상현              나주학생독립운동을 알리기 위해 세운 진원지인 옛 나주역. 사진 차상현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은 일제강점기 3대 독립                      영산포구는 옛 고려시대부터 조운의 중심지로
           운동의 하나인 나주학생독립운동을 알리기 위해                     조선시대에는 전남 26개 고을의 세곡이 모이고,

           세운 기념관이다. 진원지인 옛 나주역 옆에 당시의                  800석을 실을 수 있는 조운선 53척이 있을 만큼
           역사를 생생하게 일깨울 수 있도록 전남지역의 식                   사람과 물자가 모이던 상업적인 도시였다. 1897년
           민지적 상황과 학생독립운동의 전개 과정 등을 주                   목포항을 통한 전라도 쌀 수탈이 시작되자, 해운
           제로 2008년 개관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나주                 을 이용하기 위해 영산포를 포구로 개발하고 한반

           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을 이용                도 내륙 침탈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이곳에는 이
           하여 광주로 통학하던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들                    러한 일제와 관련된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영
           사이에 충돌이 발생한 사건이다. 일본 남학생들이                   산포 교회, 일본인 상가, 식산은행, 일본인 지주가
           한국 여학생들을 희롱하면서 한국 남학생들이 이                    옥, 동양척식, 문서고, 영산포 등대 등이 있다. 이

           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순식간에 한·일 학생 간의                   곳은 홍어로도 유명하다.
           싸움으로 번졌고, 11월 1일 광주역 충돌, 11월 3
           일 광주고보생 1차 봉기, 11월 12일 2차 봉기 등에              옛 고구려의 모습을 완벽에 가깝게 재현해 놓았다
           서 나주 학생들은 주동적인 역할을 한다, 11월 27                고 평가를 받고 있다는 나주영상테마파크. 단순

           일, 나주농업보습학교와 나주보통학교 학생들의                     한 드라마 세트장을 넘어서는 고구려 역사문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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