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1 - 관악부 100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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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U W O
1920년-1950년대
1954년 획을 여러 교무위원들과 논의하였다. 마침
1955학년도 신입생 모집에 응시한 해군군
휴전 협정으로 환도한 뒤에도 미군부대가 악대 출신의 이문용과 박승빈, 안희주 교우
학교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잠시 동안 중 를 면접에서 만나게 되자 당장 취주악대를
앙중학교의 부속 건물을 빌려 수업을 하다가 창설하기로 결정하였다. 대부분 미군악대
1954년에 2월에 이르러서야 4년간의 피난생 에서 처분한 중고품들이지만 종로에 있는
활을 청산하고 대학 본부 조직을 정비하여 종 서라벌 악기점에서 각종 악기를 구입하였
합 대학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게 되었다. 다. 당시 개인연습과 합주 공간으로 마련된
9월에는 6·25 이전에 경상대학 학장이었고 곳은 현재의 대강당 아래 옛 돌벤치가 있
전란 중에 해군 대령으로 군무에 종사하다 던 곳인데 대형 천막을 치고 장의자 몇 개 ▲ 1955년 6월 6일 고대신문 73호 1면의 기사
가 예편하여 복직한 김순식 교수가 고려대학 를 놓았다. 고려대학교의 취주악부는 이렇
교 대학원장으로 취임하였는데 부총장을 겸 게 해서 학생들의 취미활동보다는 연대와의 운동경기 시합의 응원에 필요하여 창설되었기에
하게 되었다. 학생과를 통해 직접 관리되었고 적극적인 후원도 따르게 되었다. 이후 축구 농구 럭비 농구 등
6.25사변으로 중단된 고연대항 축구전, 농구전은 10월 27일과 28일에 부활하기로 논의가 진 의 종목에서 연대와 경기가 벌어지는 날이면 취주악부가 나가서 응원전을 이끄는 것이 당연하
행되고 있었지만 연대측의 사정으로 시합일을 불과 3,4일 앞두고 무기 연기되고 말았다. 게 여겨졌다.
1955년 | 이문용(상학 55) 교우의 회고
전쟁이 끝나고 어수선한 교정은 살벌하고 정서는 고갈된 상태였으며 전후의 폐허를 복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처받은 마음의 치유도 절대 필요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고연전을 하
♪ 고려대학교 등록 써클 제1호 취주악부 탄생 는 동안 연세대는 음대생으로 구성된 밴드가 나와서 흥을 돋우고 신나게 응원하니 박수만으로는 안
되는 상황이었으므로 이래선 안되겠다싶어 방법을 찾아 나서게 된 것이 관악부 창설의 계기가 되었
습니다. 당시 대학원장이시던 김순식 교수님이 고연전의 응원을 위해서 관악부의 필요성을 역설하셨
광복 이후 고연전의 초기 응원전은 취주악보다 농악대의 요란함이 고대의 상징처럼 여겨졌
고 악기 구입을 도와주셨습니다. 이를 계기로 단원을 모집하고 관심있는 학생들이 모여 지금의 서관
다. 그러다가 연대와 정기적으로 축구, 농구 등을 통해 친선 경기를 가져보려는 협의가 진행되 자리 노천의 장소에서 연습을 시작하였고 음악소리를 듣고 가입한 단원들이 생기게 되었으며 학교
면서 농악대 위주였던 고대 특유의 응원전에도 연대처럼 취주악대를 앞세운 응원전의 필요성 당국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에 고려대학교 동아리 1호로 관악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2015년 제3회 고대 문화예술제 인사말에서)
을 제기하는 주장이 나왔다. 대학원장인 김순식 교수는 고대에도 취주악대를 창설하자는 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