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5 - 전시가이드 2023년 09월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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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itled, 91X73cm. Mixed media on canvas. 2023 Untitled, 130X97cm. Mixed media on canvas. 2023
게 진정성 있는 긍정의 에너지를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오래된 폐교 것이다. 종이작업의 한계들은 제재소(製材所)에 우연히 본 톱밥의 재해석을
안에 자리한 작업공간은 문명화된 것을 차단한 ‘내적 수행처’이자 자연과 인 통해 해소되었고, 새로운 미감의 바탕이 되었다. 톱밥의 불순물을 걸러낸 후
간을 일체 시키는 최적화된 곳이다. 작가는 파리 시절 흡수성 좋은 한지(혹은 미디엄을 섞어 ‘종이죽’과 유사한 상태로 만들어 개념적으로 본질에 가까운
종이)의 물성에서 작업의 본질을 깨닫고, 현대사회가 추구해온 욕망과 무게감 ‘류이섭 만의 작업’으로 연결한 것이다. 다양한 색과 연결한 ‘톱밥-죽’의 원형
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의 감성에 충실한 작업재료를 찾기 시작했다. 자연에서 이 ‘손의 제스츄어, 이른바 행위성(액션)’과 만나 ‘자연 추상’으로 기록하는 것
추출한 ‘톱밥’이라는 재료 역시 작품을 위해 의도한 재료라기보다, 현대산업사 이 작업의 핵심이다. 작품의 시그니쳐는 톱밥작업을 시작할 당시 ‘송화가루가
회가 남겨놓은 최소단위의 재료를 ‘재발견-재탄생(Rebirth)’시킨 것이다. 작 날리던 봄의 기억’을 살린 노란 작업들이다. 작가는 송화가루가 생명의 씨앗이
가는 의도성 짙은 예술보다 산업사회의 부산물을 ‘무제(Untitled)’라는 이름의 자 자연의 시작과도 연결된다고 말한다. 작가에게 색의 확장은 변화무쌍한 자
‘가치 추상(Value Abstraction)’으로 옮겨낸다. 회화와 결별한 ‘아르테포베라’ 연의 순환을 의미한다. 작가는 수행하듯 탱탱한 긴장 상태를 유지하면서 투명
의 정신을 진일보시켜, ‘반미학의 자연화(Naturalization through Reflection 성과 발색을 적절히 충족시키는 서너 겹의 단계를 거쳐 ‘색과 톱밥의 균형’을
on Civilization)’ 혹은 ‘버려진 재료의 부활(Rebirth of Discarded Materials)’ 캔버스에 펼쳐낸다. 행위성이 가장 잘 드러난 ‘전면 컬러페인팅 시리즈(Full
을 통해 현대사회가 앓고 있는 ‘예술노동의 가치회복’에 주목한 것이다. Color-Field Painting Series)’는 작가의 자유로운 감각이 무계획의 계획 속
에 어우러진다면, ‘세로 형상 시리즈(Vertical Painting Series)’는 정신을 집중
류이섭은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현실 세계를 본질에 가깝게 정화(淨化) 시킨 일정한 반복 속에서 어떠한 도구도 개입되지 않는 손끝의 에너지가 창출
시킨다. 예술의 상업화와 물신성(物神性)에 대한 반성은 자연과 가까운 재료 해낸 ‘감각적 부조 추상’라고 할 수 있다.
와 환경을 통해 “삶은 매 순간 유일하고, 따라서 모든 순간이 특별하다.”는 깨
달음에 이르도록 만든다. 작가는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기보다 예술창작이라 사군자(四君子)를 치듯이 자연을 자신만의 감성으로 형상화하는 작업들은 선
는 무대 위에 관람객의 감성이 최대한 녹아들기를 원한다. 작품 제목 대부분이 비들이 난을 치듯이 집중하는 상태를 요한다. 사선구도와 물결작업의 경우에
‘무제(Untitled)’인 점은 바로 아르테포베라가 추구해온 진정성의 가치를 “21 도 라인을 그어서 만든 자연이 아니라, 감성과 이성을 결합한 ‘제스츄어의 균
세기 한국작가의 본질 속에서 되살려내겠다”는 류이섭의 의지와도 상통한다. 형’을 이룬 작업들이다. 간격과 두께 등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사람의 손으로
작가는 자연의 본질과 가까운 작업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놓지 말아야 할 하는 본질적 노동을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 속에서 이루어낸 ‘균형 추상
인간의 본질을 발견한다. 절망과 고통의 다중 변주 속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Balanced Abstract Painting)’인 것이다. 작가는 “캔버스 틀을 벗어났을 때
긍정하는 자아와 만나게 된 것이다. 톱밥과 행위성을 어떤 방식으로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입체-설치’ 부
분까지 작품세계를 확장해 선보일 예정이다. 각성(Awakening)-정화(Purifi-
자연과 사람 사이의 에너지, ‘균형 추상’ cation)-발견(Discovery)을 통해 만들어진 작가의 길, 이제 좋은 바탕 위에 ‘류
이섭 만의 개성화’를 빛낼 시간이 다가왔다.
류이섭의 최근작들은 2017~2018년 당시 시작한 톱밥 작업으로부터 발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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