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6 - (사회돋보기)노규수 컬럼집-본문(최종)_N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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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에는 한도가 없어야 한다”는 옛 성현의 말을 들먹이며 조목조목 따져드니 세

               종은 한성시와 같은 향시, 즉 지역별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시위에 참여한 학생 282명은 결코 작은 인원이 아니었다. 그 시위 주동
               자로 나선 젊은 선비가 바로 강희(姜曦)라는 인물이다. 그는 말로만 떠들어댄 것

               이 아니라 제대로 실력을 발휘했다. 그때 치러진 한성시에서 당당히 차석(2위)

               으로 급제했고, 이후 이조정랑이라는 요직에 기용됐다는 기록도 있다.

                 강희(姜曦)의 호가 바로 독산(禿山)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왜 호를 하필이면 대머
               리 독(禿)자를 써서 ‘대머리산’이라고 지었느냐고 물으니 그는 “내 집 뒤에 산이

               있는데 벌거숭이산이 됐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 산을 독산이라고 한다. 원래

               는 나무가 있었으나 도성 교외에 있는 까닭에 재목으로 쓴다 하여 도끼로 찍히

               고, 소·염소 따위에서 먹힘을 당하여 벌거숭이가 되었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1019년에 거란족인 요나라가 침략했을 때 10만 명에 가까운 적을 섬멸
               한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의 후손이기도 했다. 강감찬 장군의 직계 후손

               들이 바로 금천구(衿川區. 당시는 금천현)에 모여 살아 금천 강씨로 불린다. 강희는 고

               향 금천의 산에 나무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자신의 호를 독산이라

               하여 널리 부르게 했던 것이다.
                 그가 죽고 몇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산과 나무 사랑 정신은 이어지고 있다.

               서울 금천구에 독산역과 독산동이라는 지명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강희가 살던

               금천은 그렇게 나무를 심고 가꾸는 삶의 중요성을 조선 팔도에 널리 알려온 고

               을이었다. 따라서 나무가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조선의 자연주의 철학은

               홍익인간이라는 위대한 사상과 연계되어 있었다. 나무를 통해 자연력을 복원함
               으로써 인간생활에 유익하고 윤택한 환경을 조성하자는 것이 ‘자연주의자’ 독산





             76 노규수의 사회 돋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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