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1 - (사회돋보기)노규수 컬럼집-본문(최종)_N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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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달 후면 하와이 집으로 돌아온다고 아들의 연락을 받았던 그레고리 상병의

                어머니 마리나 버클리는 피눈물을 토해야 했다. 그는 “미군은 그곳(아프간)에 가

                지 말았어야 했다. 전쟁은 끝나야 한다. 더는 안 된다”고 울부짖었다.
                  다시 고구려로 가보자. 나는 여전히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다면 만주 시베리

                아까지 우리 땅이 됐을 것이라는 희망적 가설을 지지하지만, 또 다른 가설을 제

                기하고 싶다. 고구려가 무리하게 삼국통일을 하려고 시도했다면 현재의 우리 국

                토가 중국 땅에 편입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즉 고구려와 신라, 백제가 서
                로 ‘우리끼리’ 싸웠다면 모두 당나라의 먹이가 될 수 있었다는 가설이다.

                  고구려가 삼국통일에 나설 시기는 고구려가 최강의 전성기 때일 것이니 광개

                토대왕 시절로 되돌아가야겠다. 고구려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잡은 5세기에

                광개토대왕은 주로 요동지방을 비롯한 만주 지역에서 정복활동을 했다. 그러면

                서 당시 강국이었던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이남으로 몰아냈다. 이는 내 고향인
                서울 광진구 구의동 부근 아차산성에 고구려 유적이 보이는 이유이다. 그 후 장

                수왕 때에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백제와 신라에 압력을 가하게 되

                자, 위기의식을 느낀 신라와 백제는 나제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공동대항하기 시

                작했다. 충주의 중원 고구려비는 이 시기 강대했던 고구려의 세력을 보여 주는
                대목이라고 한다.

                  하지만 고구려는 그 정도에서 멈췄다. 더 이상은 곤란했다. 광개토대왕이 백

                제를 공격해 한성을 함락시켰다고 해도 그것이 백제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 멸망 후 복신과 도침, 흑치상지 등이 일으킨 백제

                부흥군, 즉 게릴라군은 멸망 당시 백제가 동원할 수 있었던 4만 5,000명 병력 그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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